제462편 : 심보선 시인의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심보선 시인 편 ♡
-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
(원시는 4부로 돼 있는데 1부만 옮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이 집안에 더 이상 거창한 이야기는 없다
다만 푸른 형광등 아래
엄마의 초급영어가 하루하루 늘어갈 뿐
엄마가 내게 묻는다, 네이션이 무슨 뜻이니?
민족이요,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던 단어였죠
그렇구나
또 뭐든 물어보세요
톰 앤드 제리는 고양이와 쥐란 뜻이니?
으하하, 엄마는 나이가 드실수록 농담이 느네요
나는 해석자이다
크게 웃는 장남이다
비극적인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해도
나는 정확히 해석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큰 소리로 웃어야 한다
장남으로서, 오직 장남으로서
애절함인지 애통함인지 애틋함인지 모를
이 집안에 만연한 모호한 정념들과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 [슬픔이 없는 십오 초](2008년)
<함께 나누기>
우리 남매는 모두 열 명이 태어났다 하는데 저는 다섯 명만 보았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하늘로 갔다고 해서. 만약 살아계시다면 거기에 형 셋이 더 있어 저는 남자로 네 번째 전체로 아홉 번째가 됩니다. (훗날 남동생도 하늘로 감)
억울했지요, 팔자에도 없는 장남 노릇하느라. 남겨준 재산은 빚뿐인데 도와줘야 할 사람만 주렁주렁. 술만 취하면 하늘 올려다보며 구시렁구시렁댔지요, 뭘 남겨주지도 않으면서 장남으로 왜 만들었느냐고. 물론 답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 이 집안에 더 이상 거창한 이야기는 없다"
이 집안에서 아버지의 비중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버지는 진짜 집안 기둥이셨던 분입니다. 돌아가신 뒤엔 거창한 얘기가 사라질 수밖에요. 특히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절대적 존재였습니다. 어머니는 형광등 아래 초급영어 배우는데 그 실력이 나날이 늘어갑니다. 그런데 문맥으로 보아 어머니가 영어 배우는 목적이 아버지를 떠올리기 위함이란 게 드러납니다.
"엄마가 내게 묻는다, 네이션이 무슨 뜻이니? / 민족이요,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던 단어였죠"
네이션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건만 아들인 화자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아들도 금방 알아차려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던 단어라며 맞장구칩니다. 다음 이어지는 "톰 앤드 제리는 고양이와 쥐란 뜻이니?" 하는 시행도 다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아마도 이 프로그램을 아버지가 즐겨 시청했을 것, 아니면 부부가 자주 싸워 톰과 제리 같은 사이라는 말을 들어 떠올렸을 거라는 짐작이 듭니다.
"비극적인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해도 / 나는 정확히 해석하고 / 마지막에는 반드시 큰 소리로 웃어야 한다"
'비극적인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이 시구를 보아 추리가 가능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비극적이었다는 사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내내 잊지 못하고 있을지도. 슬픔을 쉬 떨쳐버리지 못함도 그렇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장남인 화자가 취할 자세는? 슬픔으로 찌든 집안 분위기를 바꾸는 일. 그래서 과장되게 너털웃음을 터뜨립니다.
"장남으로서, 오직 장남으로서 / 애절함인지 애통함인지 애틋함인지 모를 / 이 집안에 만연한 모호한 정념들과 /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애통한 분위기에 장남도 슬퍼하면 더욱 슬픈 분위기가 됩니다. 장남은 억지로 삐에로가 되어야 합니다. '끝까지 싸운다'의 뜻을 다 아시겠죠. 진짜 싸움이 아니라 슬픔 가득한 집안 분위기를 뒤바꾸려 애써 노력하다는 뜻으로.
비극의 그림자가 가정을 덮을 때 그 분위기 쇄신의 책임은 장남의 몫이죠. 그러려면 그가 가져야 할 최대의 덕목은? 바로 매사를 웃으며 넘기는 자세입니다. '비극이라 이름 붙은 비극 중 자신이 견디지 못할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상기하면서.
저도 그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군요.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단련시키려 함인 줄 모르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그분들은 다 하늘에 계시고.
#. 심보선 시인(1970년생) : 서울 출신으로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인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이 시인에게 붙은 별명은 ‘귀공자 시인’인데, 시 잘 쓰고 멋진 외모의 젊은 시인이라 함.
사회학을 하는 ‘좌뇌’와 시를 쓰는 ‘우뇌’가 공존한다는 말을 들으며, 현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전임교수이며, 펴내는 시집마다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기사를 읽음.
(시인 정보는 인터넷에서 얻은지라 사실과 다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