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를 주우면서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83)

* 도토리를 주우면서 *



아침마다 마을 한 바퀴를 돌다 다른 해와 차별 나는 유독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바로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길바닥에 놀고 있는 모습. 작년 재작년도 도토리가 보이긴 했으나 그냥 조금 눈에 띌 정도였다. 그런데 발길마다 걷어차이는 게 아닌가. 이러면 평범한 일이 아니다. 아래 사시는 할머니께 여쭤보았다.
"할머니, 올해 도토리가 엄청나게 떨어져 있어요."
"아이고매, 동촌띠가 도토리 한 말 주웠다카더니만 정말인갑네."

이어지는 말을 정리하니, 할머니 친정마을에 사시는 동촌띠란 택호를 지닌 할머니가 도토리를 한 말이나 주워 방앗간에 가 부숴 왔다고 자랑했단다. 또 덧붙이기를 그 동네 할머니들은 요새 도토리 줍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나. 그 말로 짐작하니 올해가 도토리 풍년임은 확실하다.
곁에서 얘기를 듣던 아내가 대뜸 아침 마을 한 바퀴 도는 길에 도토리 줍자 한다. 밤톨 줍기를 그리도 좋아하더니 도토리란 말에 눈이 번쩍 띄었나 보다. 운동 중에 주운들 얼마 되겠냐마는 그래도 한 열흘 모으면 최소 한 되는 될 것이니 그걸로 양은 적지만 묵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단다. 거기다 뒷산 산주가 마을 사람이니까 도토리 따는 건 아무 말도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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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는 참나무 열매다. 주로 땔감(요즘 캠핑 장작)으로 쓰이는데 또 묵 만들 재료가 되기도 한다. 혹 도움 될까 봐 알려주는데 참나무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이렇게 6가지로 나뉜다.
이 여섯 가지는 잎 열매 껍질이 조금씩 다르다. 허나 우리야 그걸 일일이 다 구별할 필요가 없다. 다만 굴참나무껍질인 굴피로 지붕을 만들면 '굴피집'이 되고, 서양에서는 포도주나 위스키를 통에 넣어 숙성하는데 쓰는 '오크통(oak)' 재료가 된다는 정도만.
이 도토리를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조금씩 다르다. 어떤 곳에선 ‘꿀밤’으로, 또 다른 곳에선 ‘도토리’로. 그런데 나 어릴 때 살던 동네에선 꿀밤과 도토리를 구분했다. 크고 둥그스름한 열매를 꿀밤, 가늘고 기다란 열매를 도토리. (반대로 부르는 지역도 있음)



열흘 정도 마을 한 바퀴 돌며 도토리를 줍다 보니 거기에 문득 삶의 묘한 진리가 담겼음을 느꼈다.

우선 도토리를 주우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어느 누구도 도토리를 주울 때 뻣뻣이 서서 줍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도토리는 뻣뻣한 사람을 싫어한다. 자세를 낮추고 허리를 구부리는 사람이라야 한 톨이라도 줍는다.
우리는 대체로 스스로를 낮추기 싫어한다. 나를 낮추면 상대가 깔볼까 봐 업신여길까 봐 한사코 고개를 뻣뻣이 쳐든다. 허나 도토리를 주우려면 무조건 구부려야 한다. 구부리면 구부릴수록 잘 보이니 많이 주울 수 있으니까.

83-1.png (어릴 때는 위의 길쭉한 것을 도토리, 아래 동글동글한 것을 꿀밤이라 부름)



도토리를 주우려 풀숲에 들어갈 때는 주의해야 한다. 꼭 도토리뿐 아니라 밤을 주우려 숲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다. 참나무나 밤나무는 주로 습한 땅에 잘 자라기에 그곳엔 독충들이 많이 산다. 지네도 흔하고 심지어 뱀도 가끔 눈에 띈다. 아마 도토리나 밤 주우려 들어갔다 이런 독성 지닌 동물 만난 적 있다면 내 말이 이해되리라.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주인 없는 걸 거저 얻으려 할 땐 위험이 늘 도사린다는 걸. 공짜란 쉽게 얻어지지 않음을.

또 도토리를 주우려 할 땐 사방을 주시해야 한다. 이 녀석은 앞에선 보이지 않다가 뒤에 오면 보일 때가 종종이다. 뿐이랴 오른쪽에선 안 보이다가 왼쪽으로 방향 바꾸면 보인다. 즉 ‘사방 주시’가 필요하다. 앞뒤와 옆, 사방을 다 살펴야 주울 수 있다.

살아가면서 사방 주시해야 할 경우가 의외로 많다. 차를 몰고 갈 때야 말할 것도 없지만 작업장 등에서 일을 할 때도 이쪽저쪽 다 살펴야 위험을 줄인다. 사업을 새로 벌일 때도 마찬가지다. 목이 좋은가, 경쟁업체가 많은가, 많이 파느냐보다 많이 남느냐 등 사방 따져봐야 할 일이 꽤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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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를 주울 때는 나름 규칙이 있다 많이 있다고 하여 다 갖고 오진 않는다. 적어도 다람쥐가 먹을 식량은 남겨둬야 한다. 간혹 쪼그리고 앉아 샅샅이 깡그리 긁어가는 사람도 보이지만 대체로 자기 필요한 만큼 주워가는 사람이 많음이 다행이랄까.

그런데 우리네 삶은 어떤가. 완전히 싹싹 다 긁어모으려 온갖 수를 쓴다. 오직 내 것만 많이 챙기면 된다는 속셈이다. 도토리를 주우면서 다람쥐까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사회에서도 남 배려하는 마음을 베푼다고 본다면 지나친 말일까.


그리고 도토리를 하루 만에 다 주울 수 없다. 한 말이나 주웠다는 할머니도 무려 보름 동안 주워 모은 것이라 한다. 흔히 말하는 '티끌 모아 태산'이란 속담에 딱 들어맞는 일이 바로 도토리 줍기다. 얼마나 작은가. 그걸 한 말 모으려면 또 끈기 있어야 할까.

성공한 사람들의 덕목 가운데 꼭 저축이 들어간다. 적은 돈이라도 수입이 생길 때마다 한 푼 두 푼 모은다. 도토리를 줍다가 어떤 날은 참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돈 주고 사면 되는데 뭣 하려 이런 고생을 하는가 하며. 그래도 모이는 재미가 그 갈등을 다 지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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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주우면서 얻은 마지막 깨달음은 ‘농갈라묵기’다. 이 낱말은 경상도 사투리로 ‘나눠먹는다’는 뜻을 지닌다. 시골에서는 벼농사처럼 팔기 위해 심는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 자기네 가족이 소비하기 위해 심거나 줍는다. 그러다 남으면 농갈라묵고.
그동안 모은 도토리를 보니 되반 정도 된다. 조금 더 모아 두 되가 되면 묵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충분한 양은 아니나 평소 도움을 받은 아랫집 할머니에게 갖다 드리면 그동안 받은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으리라.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마을 한 바퀴 돌면서 필요한 양이 모일 때까지 도토리를 주울 것이다. 아니 줍는다. ‘주울’이라는 미래형보다는 ‘줍는’이라는 현재진행형으로 마무리함도 다 그런 까닭에서다.


*. 오늘 글은 예전에 올렸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새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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