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98)
시골에서 잔디는 '필요악'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소위 전원주택엔 잔디밭이 필요합니다. 심어놓으면 좋은 점도 많습니다. 텃밭만 채소만 덩그렇게 두기보단 잔디가 있으면 보기가 좋고, 또 여름에 복사열을 흡수하여 기온 상승을 막는 효과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잔디밭엔 잔디만 자라는 게 아니라 다른 잡초도 자라니 늘 풀을 매 줘야 합니다. 마치 텃밭에 잡초 매듯이. 뿐만 아니라 그냥 놔두면 텃밭에까지 침범하여 다른 채소가 자라지 못하게 온통 녀석이 다 차지합니다.
이런 잔디의 횡포(?)에 어울리는 우화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곳은 풀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달내 계곡 옆에 자리한 들판입니다.
풀꽃들은 각자 자기 구역을 지키며 싹을 돋우고, 새잎을 나게 하고, 꽃을 피웠습니다. 간혹 남의 구역을 침범하는 녀석도 있지만 고만고만한 정도였지요. 다들 가을이 되면 뱃속 가득 씨앗을 품고 있다가 날아오는 바람 친구에게 부탁하여 씨앗들을 날리기도 하면서요.
들판의 평화는 오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가끔씩 고라니, 노루, 산토끼가 와 뜯어먹을 때야 아프기도 했지만 이내 그들은 분비물을 쏟아내 주어 거름이 되도록 해주었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주고, 하나를 주면 상대가 또 하나를 돌려줌이 적어도 거기선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라고 여겼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잔디 씨앗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렸습니다. 주변의 풀꽃들은 새로운 동무가 왔다고 반갑게 여겨 자기들 자리를 조금씩 열어주었습니다. 뿌리내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몸을 누일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안 거지요.
한 해가 지났습니다. 잔디는 자기 구역을 넓혀 갔습니다. 한데 그 방식이 그냥 조금씩 끼어드는 게 아니라 막무가내로 상대를 밀치고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뭘 몰라서 그러는 것 같다고 여기던 풀들이 불안감을 느낀 건 그즈음이었습니다. 잔디의 행동이 너무나 자기중심적이었기에.
쇠비름, 냉이, 질경이, 고들빼기, 까마중, 씀바귀들이 다 한 마디씩 하려는데 먼저 말을 꺼낸 이는 명아주였습니다.
“얘, 너는 거기에만 살아도 충분히 몸을 누일 수 있지 않니? 여기는 우리도 비좁단 말이야.”
하지만 잔디는 들은 척 만 척 그들의 땅을 침범하고는 다시 망초 밭에 들어갔습니다.
이번엔 민들레꽃이 참을 수 없어 한 마디 합니다.
“왜 너는 꼭 남의 터전을 무너뜨리면서 들어오니? 우리랑 함께 같이 살면 안 되니?”
잔디는 이번에도 못 들은 척하며 곁에 있는 바랭이 풀밭에 눈을 주는가 싶더니 이내 그쪽에도 발을 뻗칩니다.
이렇게 잔디는 다른 풀이 자라는 곳을 끊임없이 침범하니 평화와 공존의 들판은 온통 잔디만의 세상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한동안 버티던 풀들도 자기들의 힘으론 도저히 버텨낼 수 없어 정든 터전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어딘가에 붙기만 하면 살아날 자신 있다던 도둑놈풀도 떠나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엉겅퀴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아무 데나 잘 붙고 잎사귀가 칼날처럼 날카로우면 뭘 합니까. 뿌리로 촘촘히 감으며 들어오는 잔디를 당해낼 재주가 없었던 거죠.
이제 들판은 잔디 그들만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들판은 온통 잔디뿐이고, 풀꽃들로 가득 찼던 꽃밭도 모두 잔디밭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잔디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며 살았습니다. 가끔 바람 타고 날아온 풀씨들이 뿌리를 내리려면 아예 흙에 발 디딜 수 없도록 단단히 단속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이 년쯤 지났을까요? 소달구지 한 대가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퀴에 박혀 있던 토끼풀이 한참 달리던 중 튕겨 나와 잔디밭 근처에 떨어졌습니다. 토끼풀로서야 잔디가 빈틈을 내보인 곳에 떨어진 건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어쨌든 발 디딜 수는 있었으니까요.
잔디들은 처음에 그냥 ‘픽’ 하고 한 번 웃었을 뿐입니다. 겨우 토끼풀 한 송이가 뭘 어떡하겠느냐는 것이었죠. 엉겅퀴보다 사납지도 않고, 질경이보다 끈질겨 보이지도 않는 누가 봐도 연약한 풀이었으니까요.
토끼풀은 그러나 잔디 위에 바로 떨어지지 않고 빈 땅에 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흡족했습니다. 뿌리만 내릴 수 있다면… 토끼풀에겐 그것이면 다 되었으니까요.
다음 해 잔디밭에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얌전하게 자기 영역만 지키던 토끼풀이 살며시 발을 뻗어온 겁니다. 잔디들은 이번에도 ‘픽’ 하고 웃으며 막아섰지요. 저 녀석 정도야… 덩치도 크지 않고, 키도 작고, 날카로운 가시조차 없는 가냘픈 풀에 설마 했지요.
그러나 토끼풀은 한 발 내디딘 걸로 부족했던지 다시 한 발을 더 내디뎠습니다. 잔디는 그제사 경계의 등불을 켰습니다. 자기들이 어떻게 들판을 자기들만의 세상으로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겹겹이 무리를 지어 막아서려 했습니다.
한데 토끼풀은 잔디와 전략이 달랐습니다. 잔디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갔다면 토끼풀은 빈 공간만 노렸습니다. 아무리 잔디가 쫙 깔렸다고 해도 허점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잔디의 실수는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어디 봐도 강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토끼풀이 시나브로 침범하는 걸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잔디들이 인식했을 때는 이미 자기들의 터전 곳곳에 뿌리를 내렸을 때였습니다.
한 번 승기를 잡은 토끼풀은 이제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잔디가 그랬듯이 마구 밀고 들어간 겁니다. 마침내 잔디밭은 잔디밭이 아니라 토끼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제사 잔디는 깨달았습니다. 원래 이곳 풀밭의 주인이던 온갖 들풀들의 원망 어린 눈초리가 떠오르고, '함께'를 잊고 '나'만 살려하는 자신들을 꾸짖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으니까요.
#. 퇴직 후 잠시 골프장에서 막일하던 중, 그린(잔디밭)을 바꾸기 위해 미리 조성해놓은 잔디밭을 찾아다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보자마자 거기 일꾼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 미치겠네. 토끼풀이 들어왔잖아.”
제가 물었지요. ‘왜요?’ 하고.
“토끼풀이 잔디에 들어오면 그 잔디는 못 씁니다. 제초제도 듣지 않는 게 바로 저 녀석이니까요.”
우리 집 잔디밭에는 쇠뜨기가 무서웠는데 실제로 가장 무서운 건 토끼풀이랍니다. '행복'이란 꽃말의 세잎클로버와 '행운'의 네잎클로버가 그리도 무서운 존재인 걸 처음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