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3편 : 나호열 시인의 '풍경과 배경'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나호열 시인 편 ♡
- 풍경과 배경 -
누군가의 뒤에 서 배경이 되는
그런 날이 있다
배롱나무는 풍경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경이 될 때 아름답다
강릉의 육백 년 배롱나무는 오죽헌과 함께, 서천 문헌서원의 배롱나무는 영정각 뒤에서 여름을 꽃 피운다 어느덧 오죽헌이 되고 영정각이 되는 찰라 구례 화엄 산문의 배롱나무는 일주문과 어울리고 개심사 배롱나무는 연지에 붉은 꽃잎으로 물들일 때 아름답다 피아골 연곡사 배롱나무는 가파르지 않은 돌계단과 단짝이고 담양의 배롱나무는 명옥헌을 가슴으로 숨길 듯 감싸 안아 푸근하다
여름 한 철 뙤약볕
백일을 피면 지고 지면 또 피는
배롱나무 한 그루면 온 세상이 족하여
그렇게 슬그머니 누군가의 뒤에 서는 일은
은은하게 기쁘다
- [안부](2021년)
<함께 나누기>
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달에 착륙한 사람을 아십니까? 그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빠른 사람은 누굴까요? 물론 일등은 다 기억합니다. 달에 가장 먼저 발 디딘 사람은 ‘닐 암스트롱’이고, 가장 빠른 사람은 ‘우사인 볼트’니까요. 다만 이등은?
왜 우리는 일인자는 기억하는데 이인자는 기억하지 못할까요? 이인자는 항상 일인자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어딘가 모자라거나 성공하지 못한 존재, 단순히 일인자의 보조자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부통령, 부회장, 부사장, 부대표, 부반장 등.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풍경(중심 인물)이 되기를 바라지 배경(보조 인물)이 되려 하지 않습니다. 풍경은 도드라짐에 방점을 찍는다면 배경은 그냥 뒤를 메꿔 줄 뿐으로. 허나 시인의 눈은 매섭습니다. 배경에 ‘감싸안음’이라는 뜻을 보탰기에.
"누군가의 뒤에 서 배경이 되는 / 그런 날이 있다"
단체사진을 찍을 때 돋보이는 차림, 아니면 돋보이는 위치를 차지하려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와 반대로 가능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파묻히려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후자입니다.
아니 아예 사진 속에 들어가기를 싫어합니다. 배경조차 돼 주기를 싫어하는 못된 성미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배경이 되어야 할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제 얼굴은 웃어도 웃는 얼굴이 아닙니다.
"배롱나무는 풍경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경이 될 때 아름답다"
꽃나무 가운데 배롱나무(백일홍)를 떠올리면 지금 눈에 그려질 겁니다. 고 유혹적인 빨간빛을. 꽃 말고 혹 다른 게 기억나십니까? 배롱나무의 수형(樹形 : 나무 모양)은 一자로 쭉 뻗어나가지 않고 구불구불합니다. 그게 얼마나 멋진지...
배롱나무의 껍질은 잘 벗겨집니다. 벗기면 하얀 속살이 드러나지요. 그걸 겉과 속이 같은 선비의 기질에 비유도 하고. 또한 배롱나무는 지금은 전원주택의 정원수로 심지만 예전에는 산 사람을 위한 꽃이 아니라 죽은 이들을 위한 꽃이라 무덤 주변에 많이 심었지요.
“강릉의 육백 년 배롱나무는 ~~~ 가슴으로 숨길 듯 감싸 안아 푸근하다”
강릉 오죽헌의 배롱나무, 서천 문헌서원의 배롱나무, 구례 화엄자의 배롱나무, 서산 개심사의 배롱나무, 피아골 연곡사 배롱나무, 담양 명옥헌의 배롱나무 등. 이런 나무들은 저 혼자 빨간꽃으로 빛남이 아니라 바로 거기 소재하고 있는 사찰 ㆍ 서원 ㆍ 정자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들의 가치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슬그머니 누군가의 뒤에 서는 일은 / 은은하게 기쁘다”
화자의 눈에 든 배롱나무는 여름 한 철 뙤약볕에 백일 동안 피고 지는 그런 단순한 의미 말고 그 한 그루로 하여 다른 무엇을 빛나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화자는 아주 당당히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누군가의 뒤에 서기에 은은하게 기쁘다’라고.
문득 시를 읽고 나니 부끄럽습니다. 남의 배경이 되어 주기를 무척이나 싫어했는데... 어쩌면 기꺼이 남의 배경이 됨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기에 세상은 더 평화로울 수 있는데...
*. 나호열 시인(1953년생) : 충남 서천 출신으로 1986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철학박사 출신으로 현재 도봉구에서 [도봉문화원] 산하 '도봉학연구소장' 맡고 있으며, 경희대 사회교육원에서 문학과 철학을 가르침.
(시인 정보는 인터넷에서 얻은지라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