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5편 : 최영미 시인의 '사는 이유'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최영미 시인 편 ♡
- 사는 이유 -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년)
<함께 나누기>
1994년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집을 펴내면서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한 당시 33세의 최영미 시인. 1980년대 사랑과 아픔과 상처와 위선을 잘 묘파한 시집으로 평가받으면서 일약 문단의 총애를 받습니다.
허나 아무리 베스트셀러 시집을 냈어도 그 한 권으로선 생계유지가 만만치 않은 게 전업시인의 현실. 그 때문인지 시가 변모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비틀기(풍자)’를 내세워 현실비판의 시를 발표하면서 아군도 많아졌지만 반대로 적군도 생겨났고.
2017년 당대 최고 문단권력자 고은 시인을 글감으로 한 「괴물」을 발표하면서 소위 ‘미투 운동’에 불을 지폈지요. 그 시인의 행패를 아는 남성 시인이 제법 됐건만 어느 누구도 겁내 침묵할 때 용기 내 터뜨렸지만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누구보다 대접받아 마땅했건만 문우(文友)들도, 언론도, 잡지사도 더욱 멀어져 생계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고. 시인은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에 여자로 태어난 것, 서울대에 들어간 것, 어쩌다 시인이 된 것이 자신의 불행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덧붙이면 남에게 주목받을 만한 미모에다, 운동권 출신에다, 거기에 결혼 후 얼마 안 돼 이혼한 이력이 시인으로서의 능력보다 더 큰 주목을 받아 더욱 버티기 힘들었을 겁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사는 이유’를 묻는다면 저마다 다른 답이 나올 겁니다. 저는 저대로 글벗님은 글벗님대로. 이 시를 읽으셨으니 시인이 내세우는 '사는 이유'를 무엇으로 파악하셨나요?
30년 전 시인의 첫 시집이 나왔을 때 이 시를 읽고 그때 제가 아는 이에게 소개하면서 앞으로 이 시인의 삶이 순탄치 않을 거라고 예언했는데... 왜냐면 젊은 나이에 사는 이유를 ‘누군가와 싸운다’는데 두었으니까요. 물론 싸움의 대상인 '누구'는 내적 자아도 다른 사람도 다 되기에.
1연과 2연의 첫 행을 봅니다.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투명하다'는 시어의 뜻을 알아야 시에 접근 가능합니다. 순수함, 거짓 없음, 일상의 평범함, 물들지 않음으로 보는데, 1연에서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하면서 시와 술을 첫 번째로 꼽습니다.
시를 붙잡음은 평생의 동반자로 여겨서로 본다면 술 가운데 소주는 그 빛깔 자체가 투명하기 때문일 터. 소주 한 잔 하면 머릿속이 해제돼 시가 잘 쓰여진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설마 그 뜻은 아니겠지요.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와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의 깔깔웃음'엔 싱싱한 생명력과 티없는 순수함이 어려 있고,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와 '창밖의 비'와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은 늘 마주하는 평범한 일상이라 그리 느꼈을 듯.
다만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과 '안부 없는 사랑'과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는 왜 투명하다고 했을까요? 밝음보다 어둠에 친숙한 삶을 사는 이에게 이런 일은 특별한 일보다 일상적인 일로 다가와서 투명하다고 보지 않았을까 하는...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시인이 치열하게 싸워야 할 대상 첫 번째는 그때까지도 만연한 남성중심 사회. 거기에 저항할 수 있는 행동은 고작 술잔을 비워가며 마시는 일뿐. 내 의식이 투명해야 투명치 않은 모순된 사회구조와 싸울 수 있을 터. 건재함을 증명하려면 계속 투명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뿐.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 아무리 마셔도 술이 / 오르지 않는다"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짬 날 때마다 꺼내 새기고 싶은 시구입니다. 거꾸로 돌려볼까요. '투명하지 않은 것끼리 투명하지 않게 싸운 날은 술에 취하게 마련이다'라고. 살아갈수록 '투명한 것'을 잃어 갑니다. 자기의 잘못을 들춰내기보단 감추려 합니다. 자꾸만 흐리멍덩해 집니다.
아직도 치열하게 싸우고 이겨내야 할 것들이 많은데, 투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 많은데...
#. 최영미 시인(1961년생) : 서울 출신으로 1992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 33세에 펴낸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폭발적인 반응 이끌었으나 문학 외적인 풍문에 휩싸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평을 들음. 현재 모 신문에 ‘최영미의 어떤 시’를 연재하고 있음.
*. 사진은 1997년 MBC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의 스틸컷인데, 제목만 같을 뿐 시의 내용과는 상관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