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다가도 살아나는 '돌옷'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14)

* 죽었다가도 살아나는 ‘돌옷’ *



(1) 참 멍청한 풍산개 '태백'


한때 우리 집에 태백이란 풍산개가 살았습니다. ‘았’이란 과거시제가 들어가 있으니 지금은 없다는 말이겠지요. 18년 전 이삿짐 들어온 그날 한 벗이 자기 집에 키우던 개라며 데려와 함께 살게 되었으니 우리 집과 같은 나이와 생일을 가진 개입니다.
요즘은 다들 반려견이니 뭐니 고급 표현 쓰는데 저는 그냥 ‘집개’란 말을 씁니다. 오직 집을 지켜주는 목적으로 키우는 개였으니까요. 헌데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을 때까진 며칠 안 갔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전혀 다른 행동을 보였으니까요.

태백이는 길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맹렬하게 짓습니다만 그 사람이 우리 집 대문 안에 들어서면 제 집에 쏙 숨어버리고 발발 떱니다. 세상에! 아무리 ×개라 해도 자기 집 안에서는 큰소리치고 사는데 태백이 녀석은 오히려 집에 사람이 오면 숨어버리니 참 환장할 노릇이죠.
그래서 들어온 지 일주일만에 얻은 별명이 ‘자폐개’, 또는 마을 사람이나 들르는 손님은 ‘밥만 축내는 멍청이’, 심지어 이웃 할머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키운다고 갖다 버리라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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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도 한동안 고민했습니다. 집 안에 키우는 개도 아니고 오직 밖에 짐승이나 낯선 사람 오면 짖으라고 한 녀석이 제 역할 못하니. 그렇게 데리고 살다 몇 년 지난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백이가 정말 싫다면 왜 우리랑 여태 함께 살고 있는지...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래서 혹 좋은 점 있나 하여 하나둘 챙겨보았습니다.

첫째, 우리가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얼마나 열심히 꼬리 흔드는지. 정말 헬리콥터처럼 맹렬히 돌아갔습니다.
다음 태백이랑 함께 산책하다 보면 녀석이 달리니 저도 함께 뛰게 되어 건강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배 불러오고 얼마 안 있어 새끼 세 마리 낳았는데 얼마나 귀엽고 이쁜지...
또 그때까지 여름이면 보신탕 챙겨 먹던 습관이 태백이 키우면서 사라진 대신 삼계탕으로 바뀌었습니다.
게다가 이웃에 반려견 키우는 사람 만나거나 밖에 나가 동물애호가 만나 얘기하면 14년이나 키우고 있다는 칭찬까지 들었고.
결정적으로 태백이로 하여 글 쓸 소재까지 얻었습니다. 아마 일일이 챙겨보지 않았으나 열댓 편 될 겁니다.


114-3.png (태백이가 낳은 강아지 세 마리)



(2) 비만 오면 미끄러지는 ‘돌옷’


시골에는 이웃마을 소식이 참 빠르게 전달됩니다.

아랫마을에 여든 중반의 할머니 한 분이 방에서 마당 나오다 미끄러지는 바람에 엉치뼈를 다쳐 119에 실려 응급실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이 많아 다치거나 병나면 다들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만 엉덩방아 찧으면서 넘어지면 더욱 큰일입니다.
여든쯤에 넘어져 엉치뼈를 다치면 할머니들은 대개 골다공증 증세가 있어 뼈 하나만 부러지지 않고 산산조각 났다는 표현이 걸맞도록 완전 박살 납니다. 그러면 회복이 불가능하니 이제 걸어 다닐 수도 없고, 휠체어 신세를 지거나 병원에 오래도록 누워있어야 합니다.


처음 그 얘길 들었을 땐 축담에서 내려서다 헛발 디뎌 난 사고거니 했습니다. 갑자기 높낮이 차이가 나면 발 디디다 넘어질 때가 허다하니까요. 헌데 소문처럼 들려온 이야기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최근에 계속 이어진 가을장마 때문이랍니다.

장마, 참 지겹습니다. 곡식이나 밭작물엔 치명적이지만 사람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할머니처럼 '이끼'에 미끄러지는 사고를 유발하니까요. 허나 여름장마든 가을장마든 비가 계속 내리면 이끼는 아주 살판납니다. 다른 때는 돌이나 바닥에 죽은 듯이 있다가도 비만 오면 도로 살아납니다.


114-6.jpg (이끼 낀 계단 오를 땐 조심해야 함)



죽었다가 살아난다? 네 그렇습니다. 이끼를 한 번이라도 자세히 본 적 있다면 제 말에 동의하실 겁니다. 마치 잡초 뽑아 구석에 던져놓으면 이내 시들어 말라비틀어지다 죽는 것처럼 이끼도 겉모습은 그렇습니다. 말라죽은 잡초와 똑같으니까요.

그렇게 죽은 줄만 알았던 녀석이 비만 오면 다시 살아납니다. 비, 장마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도 지겨워하는 비를 이끼는 가장 반기는 게 바로 이끼입니다. 그저께 아침에도 우리 집 축담에서 대문에 이르기까지 깔린 시멘트 도로를 보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헌데 오전에 비 내려 나가 보니 동요 「파랗게 파랗게」의 한 구절처럼 “파랗게 파랗게 높은 하늘" 그대로 파아랗게 되살아났습니다. 우린 가끔 '산 것 같지 않는 삶'이란 푸념을 늘어놓으며 사는데, 이끼는 '죽어도 죽지 않는 삶', 맞습니다. 그렇게 삽니다.


114-4.jpg (이런 돌에 낀 이끼 밟았다간 100% 미끄러짐)



이끼 하면 떠오르는 분이 계십니다.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이 마을에서 마음속 제 스승으로 모신 가음댁 어르신입니다. 어느 날 이끼가 필요해서 집 근처 무덤 옆 바위에 난 이끼를 뜯고 있는데 어르신께서 지나가시다가 웃으시며 한 마디 하셨습니다.
“돌도 옷을 입는다오. 돌의 옷이 바로 이끼라오. 그런데 다 벗기시면 추워서 올 겨울 날런가.”
웃으며 하셨으니 그냥 농담으로 던진 말이겠지만 그때 ‘돌의 옷’이란 말에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에게 옷이 있다면 돌에게도 옷이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보면 분명 이끼는 돌의 옷이 맞습니다. 사람이 추위 막으러 혹은 멋지게 보이려 옷을 걸친다면, 이끼도 바위가 한겨울 된바람을 막고 이쁘게 보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함에도 우린 이끼를 이뻐하지 않는데 저도 그 한 사람입니다. 아니 도시에 사는 분들은 모르니까 그냥 두지만 저는 벗겨내려까지 했습니다. 그럼 이끼는 정말 하등 쓸모없는 존재일까요? 저 같은 사람이 마구 벗겨도 될 그런 하찮은 식물일까요?


114-5.jpg (이끼도 잘만 입히면 작품이 됨)



(3) 돌옷, 즉 이끼는 정말 피해만 주는 식물인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끼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되면 다들 고마워할 겁니다. 우선 이끼는 '산소 공급'하는 중요한 식물입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에 생물이 생겨났다 하더라도 이끼가 없었다면 그 존속은 오래가지 못했을 거라 합니다.
약 4억 6천만 년 전쯤에 이끼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이로 인해 지구에 산소를 대량 방출된 덕이라고 하니까요. 그 양이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산소 약 30% 이상에 해당될 정도라고 하니 생명체들의 생명 유지에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한 거죠.

다음으로 이끼는 작은 곤충들의 먹잇감이 되어 '자연의 먹이사슬 구조'의 주요한 축을 담당합니다. 즉 이끼는 달팽이와 톡토기 같은 작은 벌레는 물론, 순록이나 곰 같은 큰 동물의 먹이가 되어 생태계 안정에 기여하니까요.
또 한 가지 이끼의 중요한 역할은 바로 '수량 조절'입니다. 갑자기 많은 비가 숲 속에 내렸을 때 물을 흡수하여 홍수를 막아주는 역할도 합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여러 의약품 생산에 이끼가 재료로 들어가 우리의 병을 치료하는 귀중한 제품을 만드는 주요 요소가 됩니다.


114-7.png (이끼에 미끄러워질까 봐 야자매트를 깔다)



(4) 솜솜 뜯어보면 참 이쁜 '돌옷'


우리 집 태백이가 제 역할을 못하여 '자폐개, 멍청이, 쓸모없는 놈' 소리를 들었지만 따지고 보니 나름의 훌륭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끼도 마찬가집니다. 언뜻 보면 해만 끼치는 식물인 듯하나 솜솜 뜯어보면 우리에게 참 많은 도움을 주는 식물입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또 내가 모른다고 하여 내치다 보면 이끼처럼 묵묵히 제 역할 충분히 함에도 잊고 지나는 존재가 어디 한둘일까요? 특히 겉으로 드러난 한두 가지 결점으로 많은 장점을 묻어둔 채 평가하는 일을 삼가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태백이가 하늘로 간 날을 기억합니다. 2019년 12월 29일. 그러니까 만 14년 넘게 살다 갔군요.


이끼가 아무리 우리에게 도움 주는 식물이라 해도 넘어지면 큰일입니다. 우리 집 대문에서 축담에 이르는 길엔 이끼가 비 오면 다시 살아나니까요. 아랫마을 할머니가 이끼 밟고 뒤로 넘어졌다는 소식에 우리도 주저 없이 바로 야자매트를 주문해 샀습니다. 거길 밟으면 미끄러지지 않거든요.
이제 이끼, 아니 돌옷을 욕할 일이 하나 더 줄어들었습니다.

*. 오늘 글은 예전에 올렸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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