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한 소통(483)

제483편 : 복효근 시인의 '술 깰 무렵'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복효근 시인 편 ♡


- 술 깰 무렵 -


속은 풀었느냐
오랫동안 소식 없던 친구에게 문자가 온다

외로움은 사치라고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거라고
더 외로워질 날밖에 남지 않은 나이에
감상에 젖지 말자고 다짐하며 지내오는데

술에 젖었다 하면 병이 도져
어디엔가 대고 전화질을 했던 모양이다

통화 기록을 보니 물경 네 놈과 통화를 했다
그립다 보고 싶다 말했단다
내 사는 지리산 구룡계곡 단풍 좋으니
이번 가을엔 한번 다녀가라 했단다
변방에서 초라하게 낡아가는 꼴 보이기 싫어
애써 눌러온 사치스런 감상들을 창고 대방출했던 모양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울먹이기도 하고
*디립다 거친 욕도 했다는데
애써 다시 전화하여 확인할 일은 또 뭔가

술 좋다
아무 기억도 없다
술이 깰 무렵이면 통화 기록을 보지 않기로 한다

오늘도 다짐한다
외롭지 말자
그립지 말자
더더욱 사랑하지는 말자
- [예를 들어 무당거미](2021년)

*. 디립다 : 평안도, 충청도 사투리로 '막무가내로'란 뜻

9_2ecUd018svc9jri3cu5sohl_149gk0.png



<함께 나누기>



우리식 표현으로는 ‘필름이 끊기다’, 영어로는 ‘블랙아웃(Blackout)’. 이 둘 다 술 마신 다음날 전날의 상황이 기억나지 않을 때 쓰는 용어입니다. 술꾼이라면 젊었을 때 한두 번 다 겪어본 일일 터. 다만 나이 들어도 그런 일 겪는다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합니다.

제 경험을 예로 든다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다음 날 아침이면 눈 뜨자마자 휴대폰부터 뒤적입니다. 혹 누구에겐가 문자 보내거나 전화 건 흔적이 없는가 하고. 없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데면데면한 사이에게 문자나 전화 건 흔적 있으면 온종일 안절부절못합니다.


시 속의 화자는 술에 잔뜩 취해 친구에게 전화 걸었던가 봅니다. 그 친구가 화자의 상황을 확인차 문자 메시지를 보냈고. 그리고 친구에게 전화하면서 화자가 외롭다는 말을 했던가 봅니다. 그러니 더욱 무슨 일이 있는가 걱정되어 연락했을 터.

평소에 화자는 ‘외로움은 사치라고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거라고’ 자신 있게 살던 사람이었는데 잠재의식 속에선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지금 이렇게 사는 것만 해도 만족스럽지 않느냐, 감상에 젖을 나이는 아니잖아 하며 감상에 젖지 말자고 다짐하며 지내왔건만...


통화 기록을 보니 평소 늘 호기롭게 얘기하며 지내던 친구에게 전화해선 그립다 외롭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더욱 부끄럽고. 결국 화자의 속마음은 변방에서 초라하게 낡아가는 꼴 보이기 싫어 친구에게 큰소리치며 잘 산다고 했는데, 사치스런 감상을 억제해 놓았는데, 속에 감춰둔 감상을 창고 대방출했던 모양입니다.



“술 좋다 / 아무 기억도 없다 / 술이 깰 무렵이면 통화 기록을 보지 않기로 한다”



드라마에서 본 내용입니다. 아래 둘은 친하게 지내는 선후배 사이입니다. 후배가 먼저 말을 꺼냅니다.

“선배님, 미치겠어요. 제가 술만 취하면 옛 여인에게 전화를 하나 봐요.”

“그럼 안 되는데…”

“그렇지요, 날 버리고 간 여자인데…”

"그쪽도 가정이 있다면서..."

“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우리 둘 다 상대를 차단하지 않는 거예요.”



“오늘도 다짐한다 / 외롭지 말자 / 그립지 말자 / 더더욱 사랑하지는 말자”


속마음과 겉마음이 서로 반대인 반어법을 다 아시죠. 외롭지 말자는 외로워 미치겠다는 뜻이고, 그립지 말자 역시 그리워 죽겠다는 뜻일 터. 사랑하지 말자, 아니 사랑을 연필로 썼으면 지울 수 있겠지만 지울 수 없으니 문제가 되겠지요.


i_bgcUd018svclc85n0fyifd_149gk0.png?type=e1920_std



#. 복효근 시인(1962년생) : 전남 남원 출신으로 1991년 [시와시학]을 통해 등단. 전북 남원시 소재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했으며, 교과서에 여러 시가 실려 있을 정도로 좋은 시를 많이 씀.
어제 나희덕 시인도 그렇지만 복효근 시인도 나이 든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젊은이는 잘 알 겁니다. 교과서에 여러 편이 실렸으니까요. 그만큼 좋은 시를 많이 쓴 시인이라 소개합니다.


작가의 이전글죽었다가도 살아나는 '돌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