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7편 : 이기철 시인의 '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이기철 시인 편 ♡
- 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
창문은 누가 두드리는가, 과일 익는 저녁이여
향기는 둥치 안에 숨었다가 조금씩 우리의 코에 스민다
맨발로 밟으면 풀잎은 음악 소리를 낸다
사람 아니면 누구에게 그립다는 말을 전할까
불빛으로 남은 이름이 내 생의 핏줄이다
하루를 태우고 남은 빛이 별이 될 때
어둡지 않으려고 마음과 집들은 함께 모여 있다
어느 별에 살다가 내게로 온 생이여
내 생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나무가 팔을 벋어 다른 나무를 껴안는다
사람은 마음을 벋어 타인을 껴안는다
어느 가슴이 그립다는 말을 발명했을까
공중에도 푸른 하루가 살듯이
내 시에는 사람의 이름이 살고 있다
붉은 옷 한 벌 해지면 떠나갈 꽃들처럼
그렇게는 내게 온 생을 떠나보낼 수 없다
귀빈이여, 생이라는 새 이파리여
네가 있어 삶은 과일처럼 익는다
- [저 꽃이 지는데 왜 내가 아픈지](2021년)
<함께 나누기>
오늘 시를 읽다 보면 떠오르는 노래, 노사연이 부른 「바램」. 거기서도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구절. 우리네 삶이 사과처럼, 감처럼 익어간다는 점을 묘파한 시. 삶도 사람도 과일처럼 잘 익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기철 시인의 작품 공통점은 참 예쁘게 시를 쓴다는 점입니다. 어느 한 편 붙잡더라도 표현의 묘미를 느끼게 하는. 오늘 시도 그렇고 시집 제목도 그렇습니다. [저 꽃이 지는데 왜 내가 아픈지]란 제목만 보고 시집을 사고 싶을 정도로.
“창문은 누가 두드리는가, 과일 익는 저녁이여 / 향기는 둥치 안에 숨었다가 조금씩 우리의 코에 스민다”
저녁은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간이며, 과일에겐 낮에 충분한 햇살을 받아 그걸 쉬면서 무르익게 만드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과일 익어가는 향기가 알게 모르게 스미듯, 우리네 삶의 향기 역시 왕창 한꺼번에 번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시나브로 주변에 풍깁니다.
“맨발로 밟으면 풀잎은 음악 소리를 낸다 / 사람 아니면 누구에게 그립다는 말을 전할까”
맨발로 밟아야 풀잎은 제 소리를 냅니다. 바로 우리가 마음을 열고 다가갔을 때야 비로소 자연의 싱싱한 생명력을 듣게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존재 가운데 마음을 나누고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대상은 결국 사람뿐.
“하루를 태우고 남은 빛이 별이 될 때 / 어둡지 않으려고 마음과 집들은 함께 모여 있다”
낮 동안의 치열한 삶의 에너지를 다 태우고 남은 빛은 별이 됩니다. 별은 희망이나 밝은 미래를 상징한다고 봐야 하겠지요. 살다 보면 고독과 절망에 처하기도 하는데, 이를 이겨내는 최선의 방법은 이웃끼리 서로 마음 나누어야 마을과 집이 온전해야 하겠지요.
“나무가 팔을 벋어 다른 나무를 껴안는다 / 사람은 마음을 벋어 타인을 껴안는다”
나뭇가지가 서로 엉키는 모습은 어지러워 보일지 몰라도 서로를 의지하고 힘을 모으는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나뭇가지처럼 우리도 마음을 벋어(‘뻗어’의 작은말) 서로의 따뜻한 사랑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공중에도 푸른 하루가 살듯이 / 내 시에는 사람의 이름이 살고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중에도 하늘이 존재하듯 시인이 만들어내는 시적 공간에도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이 존재합니다. 즉 시를 통하여 남을 껴안고, 그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담아내려 합니다. 궁극적으로 나의 시는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를 담으려 하고.
“귀빈이여, 생이라는 새 이파리여 / 네가 있어 삶은 과일처럼 익는다”
나에게 찾아온 타인이나 소중한 존재를 ‘귀빈’이자 ‘새 이파리’에 비유합니다. 새 이파리는 ‘새 잎’이란 뜻이겠지요. 나 혼자서는 완전한 삶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삶의 완성이나 성숙을 위해서는 ‘너(타인)’란 존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과일이 익어가듯 삶이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원동력이 바로 '너'에게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 서로의 고통과 번뇌를 힘껏 껴안으며, 내 곁의 사람들과 이름을 부르고 그리워하는 할 때 우리 생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씨앗이 뿌리 내리고 싹이 돋고, 가지와 줄기에 이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져야 다시 씨앗이 생겨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시간이 흘러야 가능하고, 또 기다림으로 연결됩니다. 그 기다림은 고통이기도 합니다. 어둠과 비와 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견뎌야 하기 때문에.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내면 고통은 잘 익은 달콤한 과일로 바뀝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다림의 시간을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려 오랜 시간을 지낸 후에야 꽃과 열매가 다가옴을 잘 아니까요.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인내하며 그 결실을 거둬야 하겠지요.
#. 이기철 시인(1943년생) : 경남 거창 출신으로 197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영남대 교수로 봉직하다 퇴직했으며 현재 같은 대학교 명예교수로 계심. 재작년 81세의 연세에도 [시골버스는 착하다]는 동시집을 펴내는 등 창작 활동을 계속하며, 경북 청도에 서재 '예향여원'을 짓고 2004년부터 '시 가꾸기 마을'을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