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한 소통(499)

제499편 : 조태일 시인의 '어머니의 처녀 적'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조태일 시인 편 ♡


- 어머니의 처녀 적 -


어머니는 처녀 적부터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생사(生絲) 공장의 여공이었다

누에가 걸쳤던 새하얀 비단실 뽑아 올리면
펄펄 끓는 물 위에
기름 번지르르한 노오란 번데기가
다투어 둥둥 떠올랐다

해는 왜 그리 길고
배는 왜 그리 고픈가
현장 감독의 눈을 피해 졸고
졸면서 번데기로 배를 채웠다

힘없어 애 못 낳는 여자
한 말만 먹으면 애를 낳고 만다는
그 번데기 때문인지

열일곱에 서른다섯 노총각 스님에게
업혀 와서 칠 남매 낳으신 뒤에도
어머님은 생사 공장의 여공이었다
6ㆍ25가 끝난 한참 후에까지
- [산속에서 꽃속에서](1991년)

*. 생사(生絲) : 삶지 않는 명주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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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기>

하루는 동남아에서 온 다문화가정 안주인을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전통시장에 갔을 때 남편이 일부러 번데기를 먹어보라고 하자 기겁을 했습니다. 그 징그러운 것을 어떻게 먹느냐고.
제가 의아하게 여긴 게 바로 그 점입니다. 동남아시아에선 길거리에 지네, 물방개, 벌, 거미 튀김은 물론 전갈도 튀겨 팔았기에. 제 생각엔 번데기가 앞에 예로 든 벌레들보단 훨씬 점잖아(?) 보이고, 먹기도 훨씬 나아 보이는데...

오늘 시가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라서 고른 건 아닙니다. 시인의 시가 워낙 저항적이고 날카로워 부담 느끼는 글벗님을 생각하여 비교적 부드러운 시를 골랐습니다.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인의 가족사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시에서 언급된, "열일곱에 서른다섯 노총각 스님에게 / 업혀 와서 칠 남매 낳으신" 하는 표현 그대로 시인의 아버지는 전남 곡성 태안사 주지였습니다. 그러면 부유롭지는 않다 하더라도 먹고살 수는 있었을 텐데...
아니었답니다. 우리가 아는 현재의 태안사는 보물 다섯 점을 보유한 조계종 소속 절이나 시인의 아버지가 처음 그곳에 발 디뎠을 때는 폐허나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스님은 아내를 거느려도 되는 대처승(帶妻僧)이라 시인의 어머니와 맺어질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6ㆍ25와 여순반란사건의 소용돌이를 이 절도 넘지 못하고 엄청나게 시달렸다고 합니다. 스님으로는 생활이 어렵다 보니 어머니가 누에고치로 생사를 뽑는 공장에 다녔던가 봅니다. 이 일은 일제강점기 처녀 적부터 해왔던 일.

"해는 왜 그리 길고 / 배는 왜 그리 고픈가 / 현장 감독의 눈을 피해 졸고 / 졸면서 번데기로 배를 채웠다"

집에는 굶주린 채 당신을 기다리는 어린 자식들. 집안일과 바깥일까지 하며 생계도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얼마나 피로했을까요. 졸다가 배고프면 몰래 번데기를 훔쳐먹고. 그런 와중에도 거지를 보면 몰래 갖고나온 번데기를 나눠주었다고 시인은 후일 시로 표현했습니다.

"어렵사리 들고나온 번데기 한 움큼 / 그 (거지)왕자에게 주는 것을 / 걱정 많아 보이는 어머니의 전체를 (「다리 밑의 왕자」 중에서)"

시인이 글로 전한 일화를 보니 태안사 주변이 하도 어지러워 아버지 스님이 "이곳에는 향후 30년 동안 찾지 말거라"를 유언처럼 남겼고, 시인도 그 말에 딱 30년이 지난 뒤에 다시 찾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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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태일 시인(1941년 ~ 1999년) : 전남 곡성 태안사 주지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이 시인의 이름 앞에 ‘저항시인’, ‘민족시인’이란 접두사가 붙습니다.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며 서민의 삶을 시로 표현한 시인이라 그렇습니다.
살아 계시는 동안 '소주에 밥 말아 먹는다'라는 풍문을 낳은 시인, 이분을 기리는 '조태일 문학상'이 2019년 제정되었습니다.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그리고 시인의 저항성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두 번째 시집 [식칼론]을 인터넷 뒤져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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