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3편 : 이성복 시인의 '그렇게 소중했던가'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이성복 시인 편 ♡
- 그렇게 소중했던가 -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2003년)
<함께 나누기>
예전에 전원생활 하던 모임 회원이 다시 도시로 나간다고 하여 집에 있는 물품 가운데 필요한 것 가져가라고 해 재빨리 달려갔습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왔는데 그와 '전동대패'를 두고 잠시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분명 제가 먼저 찜했는데 자기가 뒤에 와선 자기에게 달라고.
거기서 가장 필요해 보이는 도구라 양보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갖겠다고 하자 인상이 찌푸려지더니 그때부터 모임에서 만날 때마다 사사건건 충돌하였습니다. 문제는 제가 갖고 온 전동대패가 또 우리 집에 있었습니다. 전에 구입해 찾지 못해 잃어버렸다고 포기했던 게 하필 떡하니 나타났지 뭡니까. 갖고 온 것보다 더 나은 제품이.
순간 얼마나 후회했는지... 다음 모임에 가서 그분에게 돌려주겠다고 하자 이번엔 받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돈 주고 새로 샀다면서. 그 대패가 그렇게도 소중했던가, 그 대패 때문에 사람 사이가 서먹해지고. 있는데도 가지려 했다는 누명에 욕심 많은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시 속에서 화자의 움직임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휙휙 돌아갑니다. 마치 내 숨이 가빠지듯, 커피 쏟은 내 손이 화상 입은 듯 그려집니다.
휴게소에 내려 잠깐 쉴 때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먹고 싶지요. 잠시 얼쩡거리다 보면 쉬는 짬은 금세 지나갑니다. 거기에 버스가 떠나려 하면 뜨거운 커피를 억지로 다 마시거나 아니면 버리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화자는 마시고픈 생각에 커피 쥐고 냅다 달렸습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아뿔싸, 황급히 뛰어오는 바람에 회청색 여름 양복에 커피가 쏟아져 얼룩 천지입니다. 그래도 버리기 아까워 화끈거리는 손등을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조금 남은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그러게요, 살다 보니 그런 생각도 듭니다. 무엇이 그리 소중했을까요, 무엇이 그리 소중해 놓지 못하며 살았을까요? 버려도 되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손에 쥐고 달린 자판기 커피처럼, 나는 정말 필요한 것을 놓치고 필요 없는 것만 쫓아가며 살진 않았는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꿈을 꾸는 중엔 그게 꿈인지 모르고 실제 삶처럼 느끼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일상도 실상 허무하지만 깨닫지 못할 땐 그게 전부인 양 여겨집니다. 살며 얻은 참된 깨달음을 통해 삶의 유한성과 허무감을 마주하기 전까진, 우리가 소중하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꿈처럼 허망함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이 시를 읽다 보니 인도의 성인 간디와 관련한 일화가 떠오릅니다.
간디가 여행할 때의 일입니다.
기차에 올랐을 때 그의 신발 한 짝이 플랫폼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이미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러자 간디는 지체 없이 나머지 신발을 벗어 다른 한 짝이 떨어진 곳으로 던졌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 왜 그랬냐고 묻자 간디는,
"서로 멀리 떨어진 신발 한 짝은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지요. 그렇지만 저렇게 두 짝이 되면 누구에게나 쓸모 있는 물건이 되지요. 거기에 가난한 사람이 줍는다면 더욱 좋은 일이고..."
신발 한 짝을 떨어뜨리자 나머지 신발 한 짝도 기차 밖으로 던진 간디. 그는 그 신발을 누가 가져갈지, 그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양보하고 배려한 겁니다. 그리고는 "쓸모 있는 신발을 가난한 사람이 줍는다면 좋은 일이다" 하고 스스로 만족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내가 준 만큼 남에게 당장 받지 못한다고 여기면 섭섭해 합니다.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아예 주지도 않고. 오히려 다소 손해 본 것 같은 느낌이 사실은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줄 때도 많은데.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만 만족하면 되는데.
문득 지금 나는 한 짝을 떨어뜨려서 쓸모없어진 나머지 신발 한 짝을 품에 꼭 움켜쥐고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사는 건 아닌지…?
#. 이성복 시인(1952년생) : 경북 상주 출신으로 '77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했고, 제4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계명대에 봉직하다 퇴직한 뒤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계시며,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젊은 시인이 그의 시를 많이 공부한다고 함.
시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꼽는 설문조사를 하면 생존 시인으론 언제나 최상위권에 자리한답니다. 이를 보면 일반인에겐 그리 이름 알려지지 않는 분이나, '시인들의 시인'이란 평이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