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7편 : 정희성 시인의 '민지의 꽃'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정희성 시인 편 ♡
- 민지의 꽃 -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시를 찾아서](2001년)
*. 나싱개 : '냉이'의 사투리
<함께 나누기>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 뛰놀아’로 시작하는 「무지개」란 시를 아마도 학창 시절에 배워 잘 아실 터. 거기 중간에 이런 시구가 나오지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아마 뜻도 생각나실 터.
어른들이 잃어버린 순수함과 경이로움을 어린이가 지니고 있으며, 어른은 어린이의 그런 태도에서 자연과 삶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의미로.
시에서 화자는 민지라는 다섯 살 아이에게는 아빠의 스승으로 나오니까 제 아빠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경륜은 말할 것 없고 지식과 지혜와 인품도 갖춰 완성형의 인간으로 나아가는 지점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이 드러납니다. 다섯 살 아이가 풀을 보는 관점과 나이 든 화자가 풀을 보는 관점이 전혀 다르다는 점.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질경이 냉이 토끼풀 억새’는 우리가 흔히 말하기로 잡초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이들 잡초에는 물을 줘선 안 되고 인사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함에도 민지는 아침 일찍 눈 뜨자마자 하는 일이 잡초에 물 주고 인사하기입니다. 어른이 볼 때는 어이없는 일이지요.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화자가 몰라서 묻는 게 아닙니다. 민지에게 잘못을 깨닫게 하려고 던지는 질문입니다. 잡초한테 물 주는 게 아니라고. 당연하지요. 잡초는 뽑아 없애야 할 하등 쓰잘데기 없는 귀찮은 존재이니 보는 족족 뽑거나 베 버려야 합니다.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다섯 살배기 아이는 아주 당당하게 꽃이야 하고 답합니다. 순간 꽃이 아니고 잡초야 하고 대꾸하려던 화자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습니다. 풀을 보는 관점이 전혀 다릅니다. 민지에겐 좋은 풀 나쁜 풀 없이 꽃이 피기에 다 아름다운 풀입니다.
허나 화자에겐 쓸모없는 풀은 잡초입니다. 세속적인 사고로 고정관념에 얽매여 잡초는 없애야 할 대상일 뿐 꽃이 아닙니다.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내 말은 세속의 때가 잔뜩 묻어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잃었습니다. 좋은 풀 나쁜 풀로 갈라놓았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린 민지는 대상을 순수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게 쓸모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꽃을 피워 사람을 즐겁게 해준다는 점이 같습니다.
사실 지구상에 잡초란 이름의 식물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인간의 쓸모 여부에 따라 푸새(잡초)가 되고 남새(채소)로 부릅니다. 한 예로 이른 봄에 밭에서 캔 냉이는 얼마나 우리 입맛을 돋우는지요. 그때는 없어서 못 캘 뿐 보이는 족족 캐서 끓여 먹고 무쳐 먹고 다 합니다.
그러나 한창 봄에 텃밭에 냉이(꽃)가 보이면 무조건 뽑아 버립니다. 그때는 괜히 다른 밭작물 영양을 빼앗아가는 얌체 없는 녀석 취급받습니다. 쪽파는 쓸모가 많지만 고추밭에 하나둘 올라오는 쪽파는 뽑아 버립니다. 그때는 고추 생육에 도움 되지 않는 잡초로 취급하니까요.
문득 민지를 보며 우리나라 모든 아이를 민지처럼 키울 수는 없을까요. 편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순수하게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아이로. 민지처럼 아주 작고 사소하고, 별 볼 일이 없는 하찮은 풀일지라도 살아있는 생명에의 경외심을 가지는 아이로.
#. 정희성 시인(1945년생) : 경남 창원 출신으로 1970년 [동아일보]를 통해 등단. 중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다가 퇴직했으며, 제16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 억압받는 농민과 소시민의 처지를 잘 표현한 시와 선 굵은 시를 쓴다는 평을 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