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겨울 들판의 갈맷빛 신비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58)

* 황량한 겨울 들판의 갈맷빛 신비 *



“이 집 찾아오는 길에 아내랑 같이 보고도 뭔지 몰라 선생님께 여쭤보려 했어요. 오는 길가 밭에 파릇파릇 초록빛으로 자라고 있는 게 뭔지?”
작년 이맘때 울산 동구 아파트 살 적 친하게 지내던 부부가 찾아왔다. 아마도 한겨울 길가 밭에 자라는 작물을 보고 의문을 품었을 듯.

울산에서 우리 집 오려면 양남으로 해서 오는 길과 입실(외동읍)로 해서 오는 길, 두 가지다. 양남으로 오려면 면사무소 근처 네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되는데 그 길로 들어서면 이내 비닐하우스 단지가 펼쳐진다.
요즘 하우스 안에는 다른 작물은 보이지 않고 정구지('부추'의 경상도 사투리)가 자라고 있다. 잘은 모르지만 정구지는 겨울에 난방이 크게 필요하지 않아 하우스에 이중비닐만 쳐도 겨울 나는 데 지장 없다고 한다.

비닐하우스 단지를 지나 조금 더 오면 겨울인데도 푸른 풀밭이 보인다. 차로 지나치면 그냥 풀밭이겠거니 하다가 ‘이 겨울에?’ 고개 갸우뚱하다 차를 세우고 내려 가까이 가면 그 정체가 드러난다. 바로 보리다. 한겨울 황량한 들판에 파릇파릇 생기 돋아나니 어찌 그냥 지나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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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 당뇨 판정을 받아 약을 먹는데 현미밥이 좋다 하여 쭉 먹다가 질려 보리쌀 넣은 잡곡밥으로 바꿨다. 잡곡밥이 혈당관리 면에서 현미밥에 뒤지지 않고 특히 보리쌀이 들어가면 맛도 있어 먹기 편하다는 이유로.
보리만큼 완벽한 곡식이 또 있을까? 자라는 과정을 본 적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리라, 특히 한겨울의 보리밭을 보았다면. 벼와 비교하면 보리의 위대함이 단박에 드러난다. 벼처럼 많은 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 심어놓고 그냥 둬도 잘 자라니 손이 별로 가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벼를 가리키는 쌀 ‘米’를 파자(破字 : 한자의 획을 하나씩 풀어 나눔)하면 '八十八'이 된다. 이 말은 모를 심어 사람이 먹기까지 88번이나 손이 가야 한다는 데서 쌀 ‘米’가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보리는 벼에 비하면 처음 심을 때 거름만 듬뿍 주면 약 한 방울 치지 않아도 잘 자란다. 이슬만 머금어도 버틸 정도니 가뭄도 잘 안 탄다. 나는 텅 빈 벌판에 파릇파릇한 보리 빛깔만 봐도 절로 마음이 편안해져 일부러 보리밭을 찾아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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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엔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칼슘· 엽산· 비타민 B2· 아연· 인· 철분 등이 쌀보다 훨씬 많이 들어있다. 불포화지방산도 풍부해 발암물질을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역할을 해줘 대장암 등의 예방에 좋다.

뿐이랴, 식이섬유가 풍부해 변비가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줘 쾌변을 보게 해 주고, 콜레스테롤을 낮춰 성인병 예방에 효과적이며, 쌀에 보리를 섞어 밥 지어 먹으면 혈당을 낮추며, 낮은 혈당을 오랫동안 일정하게 지속하는데 도움 준다.

이런 고리타분한 의학적 설명보다 보리의 가장 큰 힘은 뭐니 뭐니 해도 겨울을 이겨낸다는 점이다. 아무리 추워도 (아니 추워야) 보리는 잘 자란다. 눈이 내려 쌓여도 녹으면 파릇파릇 빛깔 그대로다. '아니 어떻게?'라는 의문이 들다가도 한겨울 보리밭에 서면 단박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리라.


158-4.jpg (5월의 청보리밭)



하기야 된서리 된바람을 겪으며 자란 식물 가운데 몸에 이롭지 않는 게 있을까. 시금치, 양파, 마늘, 보리, 정구지... 다들 춘화현상(春化現象)을 겪으며 자라는 식물이다. '춘화처리'라고도 하는데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겪어야 이듬해 튼실히 열매를 맺는 현상을 가리킨다.


몇 년 전 인터넷을 달구었던 한 예를 들어보자. 개나리는 우리나라가 원산지다. 호주 사는 한 교포가 봄이면 고향 집 담을 두른 노란 개나리가 떠올라 고국에 들렀다가 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 가져가 심었다고 한다.
이듬해 개나리 가지와 잎은 우리나라 있을 때보다 훨씬 무성해졌지만 꽃이 피질 않았다. 첫 해라 그런가 보다 하며 기다렸지만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꽃은 피지 않았다. 식물학자에게 문의해 본 후에야 그 까닭을 알았다.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선 개나리가 꽃을 피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또 봄에 파종하는 '봄보리'에 비해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넘기는 가을보리의 수확량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뭔가 우리네 삶에 깨우침을 주지 않는가. 혹독한 시련을 겪은 사람과 겪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158-5.png (고창 청보리밭과 유채꽃밭 - 한국관광공사 홈에서)



요즘엔 보기 드물지만 예전엔 2월 중순이면 보리밟기를 했다. 겨우내 성장을 멈췄던 보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할 때 부풀어진 땅을 밟아주려. 언 땅에 살며시 머리 내민 보리를 자근자근 밟아주면 독특한 소리가 난다. 어찌 들으면 칭얼대는 어린뿌리 달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보리밭으로 글 쓰다 어릴 때 울엄마에게 야단들으며 먹었던 꽁보리밥이 떠오른다.
예전엔 먼저 보리쌀을 삶아 소쿠리에 담아두었다가 밥 할 때 쌀과 섞어 지었다. 그래야 보리 익는 시간과 쌀 익는 시간 맞기에.
먹어도 먹어도 배 고프던 중학생 때 학교 갔다 오면 부엌에 들어가 뒤져보나 요기거린 아무것도 없고. 그러다 눈에 띈 보리쌀 소쿠리를 내려 간장에 비벼 먹었다. 나중에 울엄마는 야단치다가 울고... 다 아픈 추억이나 그게 다 그리우니.

올봄 청보리 필 때 완도군에 자리한 청산도를 찾아가려 한다. [서편제]란 영화에 나오는 청보리밭이 발길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허나 그보다 보리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한겨울에도 파릇파릇한 빛을 뿜어내는 그런 사람을. 그런 사람 만날 수 있을까?

*. 오늘 글은 예전에 올렸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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