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2편 : 오세영 시인의 '강물'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오세영 시인 편 ♡
- 강물 -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 [적멸의 불빛](2001년)
<함께 나누기>
가끔 누구나 다 아는 주제를 가지고 어렵게 풀어놓는 시를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왜 저리 읽는 이가 이해 못하게 썼을까 하고. 제가 좋아하는 시는 쉬우면서도 강렬한 울림을 주는 작품입니다. 오늘 시도 거기에 해당합니다.
요즘 흔한 '멈춤과 비움' 두 가지 명제를 다루는데 깊이와 폭이 아주 깊고 넓습니다. 아시다시피 멈춤의 반대는 ‘나아감’, 비움의 반대는 ‘채움’입니다. 사실 ‘나아감과 채움’ 이 두 낱말은 그동안 우리 삶을 지배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게 현재의 문명을 일구었으니까요.
"무작정 / 앞만 보고 가지 마라. / 절벽에 막힌 강물은 / 뒤로 돌아 전진한다"
'앞만 보며 살아오다 잠시 거울을 봤더니 흰머리와 주름만 남았더라' 이런 말 흔히 하시지요. 특히 제 나이 또래는 더더욱 살다 보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큰 벽(시련)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때 무조건 부딪히기만 하는 것이 정답 아님을 다 아실 터.
때로는 한 발 뒤로 물러나거나 다른 곳으로 돌아감이 포기나 패배가 아니라, 결국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현명한 선택임을. 절벽에 막힌 강물이 뒤로 돌아가듯, 삶의 장애 앞에서 멈추거나 좌절하는 게 아니라, 방향을 바꾸어 삶의 새 길을 찾는 지혜를 지녀야 합니다.
"조급히 / 서두르지 마라. / 폭포 속의 격류도 / 소(沼)에선 쉴 줄을 안다"
한 치 앞도 모르게 급변하는 현대 문명 속에 살아남으려면 정신없이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다만 폭포수가 ㄹ러내리다 깊은 웅덩이(沼)에 이르면 잠시 숨을 고르듯이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휴식과 여유가 있어야 에너지를 다시 모아 더 먼바다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강물이 흐르다 폭포수를 만나면 절벽을 부술 듯이 내리쏟아지지만 소(沼)를 만나 고요함도 찾습니다. 우리네 삶도 그렇지요, 격량 속에서 산다고 하여 늘 긴장해선 안 됩니다. 잠시 쉬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어떤 물이든 최종 목적지는 바다를 향하지만 처음부터 거기를 목표로 흘러감은 아닙니다. 그저 자신을 흐름에 맡길 뿐. 우리도 욕심이나 조급함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오히려 삶이 참된 가치와 평온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얻습니다.
여기서 무심함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집착을 내려놓은 존재의 자유이며, 텅 빈 마음은 욕망을 비운 자리에 깃드는 충만함입니다. 모든 삶은 흐름을 중시합니다. 때론 막히면 돌아서고, 너무 빠르다 싶으면 멈추며, 혹 나의 흐름이 누군가의 흐름을 가로막는지도 살펴가며.
오늘 새로운 주일이 시작되는 첫날, 무언가에 막혀 답답함을 느끼거나 살아가는 속도가 빠르다고 느끼시는 분들에게 이 시는 도움을 주리라 여깁니다.
내 앞에는 폭포만 있는 게 아니라 잠시 쉬어갈 '소(沼)'도 있다고.
[뱀의 발(蛇足)]
제가 만약 문학 창작에 관심 많은 이들 앞에 강의할 기회가 있다면 꼭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먼저 시를 공부해라."
먼저 '시인이 되어라'는 뜻이 아니라 소설가가, 극작가가, 수필가가 되고 싶든 적어도 하루에 시 한 편 읽기가 벅차거든 일주일에 꼭 한 편 이상 읽어라고.
우리가 영화를 보고 난 뒤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기도 하고 대사 한 마디가 더 오래 남기도 합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구절 기억하면 전체를 기억하는 듯이. 그 한 구절은 거의 대부분 좋은 시구처럼 가슴에 쟁여집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내일의 해는 내일 다시 떠오른다"와 [초원의 빛]에서 "한때 그리도 빛나던 것이 이제는 영원히 스러졌어라 /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란 소설에서 "우리의 과거는 어둡고 그 미래는 불안하다. 생동하는 오늘, 오늘을 잡아라."처럼.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 수상한 한강 작가가 시인으로 등단했다가 소설 썼음은 다 아는 일. 그밖에도 [소나기]로 유명한 황순원 님도 시인으로 등단했다가 소설가로, 이상 역시 먼저 시를 쓰다가 불멸의 소설 [날개]를 썼음은 다 아는 일.
시를 공부하면 다른 장르의 작품을 쓸 때 깊이가 깊어지고 그 맛이 진해 집니다. 그럼 너는? 혹 이런 질문 나올까를 대비해 미리 답합니다. 타고난 문재(文才)가 옅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시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아예 글 쓸 마음조차 먹지 못했을 거라고.
#. 오세영 시인(1942년생) : 전남 영광 출신으로 1968년 [현대문학]을 통하여 등단. 제1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자이며,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퇴직한 뒤 81세인 2023년 [77편, 그 사랑의 시]란 시집을 펴내는 등 왕성하게 시를 씀.
*. 첫째 밀양 호박소(沼) 사진은 네이버 블로그 'MAGIC콜'에서, 두 번째 사진 백담사 경내에 있는 오세영 시인의 ‘강물’ 시비(詩碑)는 네이버 블로그 ‘수원사랑 만석거사’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