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티나지 않는 일

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70)

* 표티나지 않는 일 *



요즘 비 오지 않는 날이면 텃밭과, 집 들어오는 주변과, 언덕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잔일을 한다. 어제도 오전에 일한 뒤 옷이 땀에 젖어 샤워하고 나왔을 때 마침 밖에 일 나갔던 아내가 돌아와 보더니,

“일 많이 하셨나 보네요.”
점심 식사 후 아내는 열무 심으러, 나는 오전에 하다 끝내지 못한 일을 마저 하러 밭에 나갔다.
“오전 내내 무슨 일 하였어요?”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지만 당장 대답할 말을 잊었다. 분명히 쉬지 않고 일했건만, 그래서 샤워도 해야 했건만, 내가 봐도 뭘 했는지 표티나지 않으니까.

“그냥 밭에서 똥폼 잡고 서 있기만 했지.”
머쓱하여 꺼낸 말이었다. 한 일을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으나 관뒀다. 그러면서 문득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아니다. 흔적은 없어도 - 사실은 없는 게 아니라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만 – 분명 일을 했다. 그것도 땀 뻘뻘 흘릴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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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은 풀 뽑기였다. 풀 뽑기와 풀베기는 다르다. 잡초를 베야 할 때가 있고 뽑아야 할 때가 따로 있다. 지금은 뽑아야 할 시기다. 잡초 뽑는 도구는 호미요, 베는 도구는 예초기다. 뽑을 때는 쪼그리고 앉지만 벨 때는 서서 한다. 이런 점 말고도 일 끝낸 뒤 가장 차이가 난다.
길가나 언덕 위 잡초를 예초기 한번 돌리고 나면 누구의 눈에든 일한 표티가 확 난다. 무성하던 풀이 싹 베어져 없으니까 당연한 일. 장발이던 사람이 단발로 했을 때와 똑같다. 허나 풀 뽑기는 베기만큼 힘들지만 눈으로 보면 일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아랫집 가음댁 할머니는 겨울을 빼놓고는 밭에 사신다. 사는 정도가 아니다. 밭이 방인 양 일하다가 어떤 땐 흙에 눕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할머니가 참 부지런하다고 여겼다. 그러다 이내 '일을 잘 못하는구나'로 변했다. 일한 표티가 나지 않았으니까.

하루는 하도 궁금해 할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밭에 가 둘러보니 무슨 일 했는지 눈에 선뜻 들어오지 않았다.
날마다 밭에 붙어 사는데도 별반 달라진 건 없었다. 심지어 뙤약볕 아래 한여름에도 콩밭에 들어가 팥죽땀을 흘리며 일했을 때도.

노상 하는 일은 풀 뽑기. 그랬다, 오늘도 내일도 풀 뽑기. 풀 뽑기는 일을 해도 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른다. 자세를 낮춰 살펴봐야 겨우 보일 뿐. 당연한 말이겠지만 풀을 뽑으면 베었을 때보다 훨씬 늦게 자란다. 이런 점 말고도 작물이 자리 잡기 전에 올라오는 족족 뽑아야 한다.
어떤 작물이든 키가 쑥 올라오면 잡초가 쉬 머리 쳐들지 못한다. 평소 잡초 자라는 속도와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니 쪼그리고 앉아 호미를 들어야 한다. 하고 나서도 뭘 했는지 표티나지 않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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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엔 표티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계신다. 아침 출근 전인 신새벽 일찍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나와 일하고 들어간다. 그분들이 깨끗이 쓸고 가거나 쓰레기를 치운 뒤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늘 깨끗하다고만 여길 뿐 그 노력을 한 주인공은 생각지 않는다.
모두가 잠든 밤에도 긴급전화가 올까 봐 비상대기 중인 119 대원들, 낮에 “삐뽀!” “삐뽀!” 소리 날 때만 일을 하는가 보다 할 뿐. 긴장한 채 비상대기하는 그 시간이 실제 활동하는 시간보다 훨씬 많건만 구급차 소리가 나지 않으면 지나쳐 버린다.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 우리는 낮에 장사하러 나온 그때의 아저씨 아주머니 모습만 본다. 허나 싱싱한 생선을 사기 위해, 신선한 야채를 공급하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나와 서두르는 걸 모르고 지난다.
그리고 집안일만 하는 전업주부도 그리 말한다. 또래 직장 나가는 여성들은 하다못해 월급이라는 결과물이 있지만 하루종일 집안일 해봐야 표티 안 난다고. 알아주는 사람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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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하기 전 남녀공학인 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당시 '방과후수업'은 정규수업이 끝난 뒤 시작했다. 만약 방과후수업만 없다면 청소 끝난 뒤 아이들이 하교하면 다음날 아침 깔끔하게 책걸상 정리된 상태로 수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소 뒤 방과후수업이 있다 보니 아침에 일찍 와 둘러보면 엉망이었다. 한창 별나게 설칠 나이 아닌가. 한두 번 나 혼자 일찍 출근해 책걸상 정리하다 짜증 나 종례 시간에 특별히 강조했다. 우리 교실에서 수업하는 학생들이 책임지고 정리한 뒤 가라고. 그러지 않으면 혼날 거라고.
(이동수업을 해서 여러 학급학생이 섞여 수업함)

다음날 아침 교실에 가보니 한 애가 일찍 와 앉아 있고 책걸상은 반듯하게 정리돼 있었다. 나는 당연히 어제 종례 때 한 훈시의 효과라 여겼다. ‘역시 엄포를 놓으니 말을 잘 듣는구나.’ 하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책걸상은 잘 정리돼 있어 마음을 놓았다. 그러다 우연히 보았다, 한 학생이 일찍 와 책걸상 정리하고 있는 모습을. 그 애는 자폐 증세가 있어 애들에게 따돌림당할 때가 많아 늘 주의를 기울이던 중이었다. 설마 하여 물어보니 여태 그 애가 한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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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례 시간에 전체 아이들에게 그 애가 한 일을 칭찬삼아 얘기할까 하다 그만뒀다. 그러잖아도 무시당하던 애인지라 혹 좋은 소리보다 나쁜 말 나올까 봐.
다만 생활기록부에 이런 글만 남겼다.
‘표나지 않는 일을 하지만, 가장 표나는 일을 하는 소녀’

*. ‘표티나다’는 ‘표나다’의 경상도 사투리입니다.


*. 오늘 글은 예전에 올렸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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