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3편 : 이덕규 시인의 '밥그릇 경전'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이덕규 시인 편 ♡
- 밥그릇 경전 -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 [밥그릇 경전](2010년)
<함께 나누기>
이 시를 처음 읽으면 개에게 바치는 찬가(讚歌)로 느껴질 겁니다. 한 번 더 읽으면 거기에 담긴 뜻을 찾으려 달려들리라 생각됩니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 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선불교에서 가장 많은 화두를 남긴 선사를 꼽으라면 아마 당나라 때 선승인 조주 선사일 겁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논구하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과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까닭을 묻는 제자에게 바로 뜰 앞에 서 있는 잣나무라고 답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가 유명하지요.
이 스님에게 제자 한 사람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합니다.
"저는 공부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큰스님께서 잘 지도해 주십시오." 하자, 선사가 엉뚱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침 먹었느냐?"
"예."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바로 여기서 조주세발(趙州洗鉢)이라는 화두가 나왔습니다.
시의 맨 끝에 나오는 “할 일 없으면 /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는 바로 그 문답에서 글머리를 잡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화자는 어느 날 절에 갔다가 개밥그릇을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탑을 본다든지 대웅전에 들어가 불공드린다든지 하건만...
절의 개가 무척 심심했던지 제 밥그릇을 갖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상태가 됩니다. 얼마나 세게 물어뜯었든지 “테두리에 / 잘근잘근 씹어 외운 /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습니다.
그 이빨자국을 평범한 이들은 그냥 넘겼겠지만 화자에겐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치 팔만대장경처럼 또 하나의 경전으로 보였으니까요. 조주 선사는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없다!’라고 단언했는데, 개가 불성을 지녔는지 여부는 저는 사실 모릅니다. 헌데 한 가지 아는 사실은 그런 개밥그릇에서 불성을 본 화자라면 분명 불성을 지닌, 즉 깨달음을 얻은 사람일 겁니다.
우린 밥그릇에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네 밥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나?” 하면 그의 인격이나 도량, 이상 등을 가리키니 그의 사람됨이 될 것이요,
“저 인간들 또 밥그릇 싸움하네.” 하면 생존과 결부된 욕망을 가리킵니다.
밥그릇 욕망은 가장 치열합니다. 왜냐하면 먹고사는 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말이지요. 그러면 화자가 개밥그릇에서 깨달은 점은 무엇일까요?
“앞발로 굴리고 밟고 /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개 하는 짓이 바로 우리네 삶의 모습과 같습니다. 내 밥그릇 지키기 위해 물어뜯으면서 피 터지게 싸웁니다. 그러다가 화자는 문득 개가 깨끗이 핥아 반짝반짝 빛나는 밥그릇을 보면서 우리도 마음의 욕망이나 번뇌를 그렇게 없애야 하지 않을까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어느 경지에 이르면 / 그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개밥그릇이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듯이, 내 마음도 환해질 텐데 좀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어떡하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요? 조주 선사의 “할 일 없으면 /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는 가르침대로 어지럽고 더럽혀진 내 마음 닦는 일부터 해야 할까요?
#. 이덕규 시인(1961년생) :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1998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토목과를 나와 토목기사로 일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노작 홍사용 문학관] 관장일도 보고 있음.
*. 첫째 사진은 개밥그릇이라는데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으며, 둘째는 AI 활용으로 만든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