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가을 동기모임에 갔더니 마흔 다 됐음에도 홀로 사는 아들을 둔 벗이 아들에게 이리 말했다고 한다.
"꼭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도 된다. 즉 동남아시아 아가씨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러자 아들이 픽 웃더니,
"우리 아빠 이젠 글로벌화되었네." 하기에 그때 친구가 한 마디 덧붙였단다.
"단 까무잡잡한 얼굴은 안 된다."
그 말을 두고 모인 벗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검은 피부는 안 된다는 측과 피부 빛이 뭐 상관이 있느냐는 측. 논란은 11 : 1로 일방적이었다. 아직 우리 사회에 검은 피부에 대한 선입견이 남았음인가.
만약 내 아들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면... 나 또한 쉬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리라. 같은 유색인종임에도 좀 더 검은빛은 허용 안 하려는 자세가 저 안 깊숙이 들어 있음이라.
중남미 여행 중에 가장 먼저 들른 곳이 바로 '과달루페 성모성당'이다. 이곳은 가톨릭 신자라면 한 번쯤 꼭 들러야 할 곳이다. 나보다 아내가 더 좋아했다. 6년 전 유럽 성모 발현 성지여행을 떠나 포르투갈에 가선 '파티마의 성모님'을, 프랑스에 가선 '루르드의 성모님'을 뵈었는데, 마무리 짓지 못하던 차 마지막 남은 성모 발현 성지를 방문했으니...
성지에 들어서자마자 성전에서 울려 퍼지는 파이프오르간의 장엄한 음률! 저도 모르게 끌려 찾아든 성당 안에선 마침 미사가 집전되고 있었다. 아내와 난 잠시 망설였다. 일행 대부분이 비신자라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뿐. 미사 참례를 하면 성지의 다른 보물들은 구경 못하니... 결국 미사를 포기하고 다른 보물을 둘러보기로 결정.
비가톨릭 신자에게 있어선 이 성지는 그리 의미 있는 곳이 아니다. 일종의 설화(꾸며낸 옛날이야기)로 취급할 게 너무나 뻔한 일. 이미 2,000년 전에 돌아가신 성모님이 1,500년이 지나 생생한 모습으로 사람 앞에 나타나 엄청난 메시지를 전했다고 하면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릴!" 할 테니까.
(과달루페에선 1531년에, 루르드에선 1858, 파티마에선 1917년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이를 '발현'이라 한다. 성모 발현에 관한 얘기는 인터넷을 참조하시길)
"나(성모 마리아)는 비탄에 빠진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나의 사랑과 연민, 구원 그리고 보호를 증거로 제시하는 표시로 내가 발현한 이곳에 성당 세우길 바라고 있다."
성모님을 처음 만난 ‘후안 디에고(나중에 가톨릭 성인 반열에 오름)’가 대신 전해준 말씀에 따라 이곳에 1709년 성전이 처음 세워졌다. 헌데 호수를 메운 땅 위에 짓다 보니 200년이 지나면서 지반 침하로 기울어져 1976년 만 명이 동시에 미사 참례할 수 있는 대성당이 새로 지어졌다.
이 성전에서 가장 감명 깊은 자료는 성화(聖畫) 속의 성모님 모습. 바로 까무잡잡한 얼굴. 늘 투명하다시피 맑고 하얀 백인 성모상만 보다가 인디언 모습을 보았으니... 사실 성모님은 유태인이기에 당연히 백인 형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던진 충격. 그래서 다른 건 젖혀두고 그 성화에만 눈을 떼지 못했다.
성모님을 만난 후안 디에고가 그 사실을 당시 멕시코 주교에게 전하자 처음에 믿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좀 고귀한 인물이 아닌 하찮은 농부에게 나타났으니. 말이다. 디에고가 다시 성모님을 만났을 때 그분이 주신 장미를 틸마(멕시코인들의 겉옷)에 싸 갖고 가 주교 앞에 펼치는 순간 성모님의 모습이 새겨진 그림이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 성화를 말함이다.
(참고로 1979년 저명한 미국 과학자들이 모여 이 성화의 진실성을 규명하기 위한 최고 수준의 작업을 한 결과, 이 그림에는 도료와 붓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즉 인간이 손이 닿지 않은 초자연적인 작품이란 결론을 내렸다고 함)
인디언 앞에 나타난 인디언 모습의 성모님. 억지로 지어낸 듯한 이 얘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님은 모든 이의 구세주이듯이 성모님 또한 모든 이의 성모가 되어야 함에도 우린 은연중 백인들의 예수님과 성모님으로 인식함을 부인 못한다.
여기에 과달루페의 성모 성화는 그게 아니라 성모님은 모든 이의 성모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려 함이 아닐까. 즉 라틴아메리카에선 그에 맞는 형상으로 아픈 이들을 어루만져 주려 함이라 여긴다. 그곳에서 수백만 명 죽음의 비극을 가장 잘 아시는 그분이 그들의 아픔을 그 모상으로 나타나 어루만지려 하심이리라.
그래선지 역사상 과달루페 성모 발현만큼 파장이 컸던 발현은 없다고 한다. 태양신과 잡신을 숭배하던 아즈텍인 800여만 명이 발현 7년 만에 거의 전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사실. 또 성모 마리아가 한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는 사실.
(멕시코 독립전쟁 때 독립군 대장 미겔 이달고와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이끈 군대는 이동할 때마다 과달루페의 성모가 그려진 깃발을 앞장 세웠다.)
그리고 이런 말이 나돈다고 한다. "멕시코에선 가톨릭 신자는 90%이나 과달루페노는 100%다." 이 말은 비신자라도 과달루페 성모님은 모두 다 믿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멕시코에선 과달루페 성모님이 종교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직 피부 빛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어리석은 양을 깨우쳐 주는 그 넉넉한 품에, 오늘 하루가 참으로 의미 있는 날이 되었다.
'까무잡잡한 성모님, 정말 고맙습니다.'
*. 커버 사진은 '과달루페 대성당(신성전)'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