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 여인이여, 나 눈멀어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네 꿈속에서나 그댈 보네 눈감고 그대를 바라보고 있네 - [단편들](1997년)
#. 박정대 시인(1965년생) : 강원도 정선 출신으로 1990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제19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중등교사로 근무하다가 시를 쓰기 위해 뛰쳐나왔으며, ‘기인’이라 불릴 정도로 자유분방한 감성의 소유자. ‘밥 딜런’의 노래와 ‘장만옥’과 ‘등려군’의 영화와 노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과 ‘체 게바라’와 ‘카뮈’를 좋아하여 시 글감으로 씀.
<함께 나누기>
시인 소개에서 언급했다시피 홍콩 영화와 배우를 글감으로 한 시를 많이 썼습니다. 제가 작년에 (장만옥)을 2020년에 (등려군)을 배달했는데, 오늘은 양조위까지 첨가하게 되었군요. 참고로 시인은 ‘양조위’란 제목에서 세 편의 연작 시를 실었는데 그 가운데 한 편입니다. 「동사서독」에 의한 변주(變奏)란 부제를 보다시피 이 시를 이해하려면 "동사서독(東邪西毒)"이란 영화를 알아야겠지요. 홍콩 영화의 명장 왕가위 감독의 영화, 원래 무협작가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여기에 기라성 같은 홍콩 배우들이 나옵니다. 장국영, 양가휘, 장만옥, 임청하, 양조위...
영화 줄거리는 생략합니다. 다만 주인공 간의 인과관계를 알아보려고 간단히 소개합니다. 장국영은 구양봉(東邪) 역을, 양가휘는 황약사(西毒) 역을 맡지요. 이 둘은 절친이었건만 나중에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합니다. 구양봉(장국영)은 원래 시골에 사는 청부살인업자인데 자애인(장만옥)을 사랑합니다. 허나 최고 검객이 되기 위해 그는 사랑 대신 수련의 길로 떠납니다. 그러자 자애인은 복수의 마음으로 그의 형과 결혼하여 형수가 됩니다.
구양봉의 유일한 친구는 황약사뿐. 거기에 황약사(양가휘)가 자애인을 사랑해 문제가 일어납니다. 황약사에게 구양봉은 친구이지만 연적. 특히 자애인이 구양봉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 알자 갈등하게 되고... 이러한 사랑과 배신, 증오와 복수는 다른 인물들에게 계속 이어집니다. 대연국(大燕國)의 공주이며 남장미인 모용연(임청하)은 황약사를 좋아하나 무관심한 그에게 원한 갖게 되어 구양봉에게 그를 죽여 달라 하고.
이 가운데 오늘 시와 관련 있는 양조위를 소개합니다. 그가 맡은 역은 "맹무살수". 그가 맡은 역할이 다른 역에 비해 미미합니다. 원래 장국영이 맡은 구양봉 역을 하기로 했는데 나중에 바뀌었답니다. 양조위는 맹무살수, 달리 말하면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맹인 검객. 그 아내는 황약사와 불륜을 저질렀고. 그러니 그에겐 원수나 다름없지요. 자신의 아내와 바람난 황약사를 다시 만나면 죽이겠다고 맹세했지만,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는 눈이 보이지 않아 죽이지 못합니다.
결국 맹무살수 양조위는 황약사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를 만나기 위한 노잣돈이 필요하다며 구양봉을 찾아옵니다. 허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눈이 점점 멀어져가는 상황임에도 자청하여 무리한 임무를 맡습니다. 왜냐면 아내에게 돌아간다고 해도 아내가 자신을 다시 사랑할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양봉의 도움으로 마적떼와 혈투 벌이던 도중, 날씨가 어두워지면서 시력 문제로 인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목숨을 잃고 맙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복사꽃 여인이여" 영화를 보면 맹무살수(양조위)의 대사가 나옵니다. '내 고향에 봄이 오면 복사꽃이 아름답게 핀다' 이 내용을 구양봉(장국영)에 전하고 죽은 뒤 구양봉은 그의 유언을 지키려 아내에게 소식 전하려 그의 고향을 찾아갑니다. 어 그런데 웬걸, 그의 고향마을을 찾아간 구양봉은 거기서 복숭아꽃을 구경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맹무살수가 보고 싶다던 복숭아꽃은 바로 '아내'였으니까요. 그러니까 복사꽃은 꽃을 가리킴이 아니라 아내를 비유한 말입니다.
"나 눈멀어 다시는 고향에 / 돌아가지 못하네" 단순히 시력을 잃어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함이 아닙니다. 고향엔 (비록 불륜을 저질렀지만) 그가 죽도록 사랑한 아내가 있습니다. 그 아내가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서입니다. 다시 또 '당신이란 남자를 보고 싶지 않아요'란 말이 나올까 봐.
"꿈속에서나 그댈 보네 / 눈감고 그대를 바라보고 있네" 현실에선 만날 수 없는 그대,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참 애잔한 장면입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생각나는. 고향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니 볼 수 없어 눈을 감고 꿈속에 들어가서야 그녀를 볼 수 있음을. 문득 시인이 [나는 희망에 관해 말하려 한다]라는 글에서 언급한, "내 아픔은 설명할 길이 없다. 내 아픔은 너무 깊어서 원인이 있는 적이 없고, 원인이 있을 필요도 없다"가 떠오르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