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편지(제16편)
@. 제게 학교와 학생은 어느 때든 첫사랑이었고, 그때 아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첫사랑의 편지입니다.
오늘 편지는 울산 모 실업계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만났던 여학생이 보낸 편지로 모두 두 번 나눠서 받았습니다. 첫 번째 편지는 그 학교 근무할 때 보낸 편지이며, 두 번째 편지는 다른 학교로 옮긴 뒤 받은 편지입니다. 두 편의 내용이 조금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 첫사랑의 편지(16) *
<첫째 편지>
OO 나으리께
OO 나으리 안녕하세요?
더위가 가실 줄 모르고 오던 비들까지도 몰아내며 기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물을 보면 사족을 못 쓰는 동네 꼬마 녀석들이 새까만 몸을 내보이면 푸는 바다 속에서 색의 조화를 만들어 댑니다.
일산해수욕장은 이런 꼬마들의 발자국들로 움푹움푹 패여 그들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런 모래사장 위를 다시 걸어보노라면 그들의 발자취 속에서 지나가는 시간들을 얘기하게 됩니다.
벌써 방학 생활도 막을 내릴 때가 다 되었습니다. 방학 중 한 가지 추억을 만들고 싶었었는데... 지금 이렇게 엉뚱한 말들을 늘어놓은 저는 1학년 OO과 2반 정 OO입니다.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는 좋은 핑계라면 편지 쓰고 싶은데 쓸 사람이 없었고, 좀 나쁜 핑계라면 방학 과제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편지지 고르는데 무척 고심했어요. 이 편지지 괜찮냐 모르겠네요. 친구는 괜찮다고 하던데요.
방학 동안 무얼 하고 지내셨어요? 전 학원 다니고 집에서 TV 보고 책 좀 읽고 하면서 보냈어요. 책에 대해서 제일 반갑겠지요? 왜냐구요? 그야 선생님은 국어 담당이시니까요.
이제 며칠 있으면 선생님을 뵐 수 있겠네요. 별로 할 말을 없구요, 뵐 때까지 몸 건강히 계세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너무 짧은 글 죄송해요)
(19)89년 8월 20일
정 OO 올림
<둘째 편지>
선생님께!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선생님께서 저의 학교를 떠나신지도 벌써 한 달 하고도 보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지금 계시는 학교는 인문계이니까 저의 학교 OO OO보다는 좋으시겠죠.
참 1학년 담임을 맡으셨다던데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전근 가시자마자 적절하실 텐데 참 잘되었습니다. 왠지 거창한 인사말을 선생님께 적어드리고 싶은데 좋은 낱말과 말 표현이 잘 안되는군요.
선생님께서 저의 학교를 떠나시던 날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답니다. 저희들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정말 선생님 너무 하셨습니다. 전 그날 저의 눈에서 쏟아지는 물이 소나기인지 눈물인지 분간을 못할 만큼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답니다.
전 그날 새삼 느낀 바가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아니 얼마나 좋아했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요즈음 나의 학교 생활은 갈등과 고민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전 요즈음 제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후회로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답니다.
또 국어 시간이 되면 선생님 생각이 절로 난답니다. 언제나 국어 시간이면 조용하고 정확한 시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지금 저희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총각이어서인지 첫 발령을 받아서인지 아님 꺼벙해서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이 떠들어도 조용히 해라 소리는 한마디도 안 하시고 이건 수업을 하는 건지 정말 하는 둥 마는 둥 선생님 계실 때와는 영 딴판으로 가르치시니까 어리벙벙해서 저뿐 아닌 우리 반 아이들이 꼭 한 마디씩은 해야 무사히 넘어가는 국어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근을 가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만 생각하면 울고 싶을 때도 많답니다. 요즈음은 왠지 시무룩한 게 힘이 없답니다. 음악과 독서를 좋아하던 나 자신이 요즈음에 와서는 멍한 게...
일천구백구십 년 사월 십일일
수요일 1시 43분 49초
제자 정 OO 올림
<함께 나누기>
오늘 편지를 쓴 주인공은 현재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올해 쉰 조금 넘었는데 얼마 전 이 편지를 보여줬더니,
“어머 아직 제 편지 갖고 계세요?” 하기에 “내 첫사랑의 편지는 없앨 수 없지.” 했습니다.
제가 언제나 방학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과제를 내줬지요. 담임선생님이나 다른 선생님께 꼭 편지 한 장 쓰라고. 정 보낼 선생님 안 계실 때면 나에게 편지 하라고. 다행히(?) 제게 편지가 많이 와 추억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편지 속의 소녀는 당시 국어학습 도우미였습니다. 수업 전에 교무실에 외 필요한 교재를 갖고 가는 게 주된 임무였습니다. 워낙 귀엽고 재치 있어 이쁘게 대해줬더니 한 번씩 슬쩍슬쩍 농담도 할 정도로 친해졌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편지 첫머리에 ‘OO 나으리께’로 시작하였던가 봅니다.
얼마 전 전화했을 때,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부른 게 기억나니?” 했더니, “그럼요, 그렇게 불렀더니 친밀감이 더 솟던데요.” 하더군요.
두 번째 편지에서 소녀는 울고 있습니다. 제가 다른 학교 갔기 때문이지요. 그때 아이들에게 절대로 다른 학교 가지 않겠다고 했건만... 아시다시피 국, 영, 수 담당 선생님은 인문고에 가야 제대로 수업할 수 있다는 말을 다들 했거든요.
그래서 떠나는 날에도 차마 약속 어기게 된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이들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편지 속에서 소녀도 그렇게 말하고 있네요. 참 못난 선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