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21)
제121편 :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y 23. 2024
@. 어제 우리 시단의 큰 별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신경림 시인. 오늘은 그분을 기리고자 이십여 년 전 배달한 시를 올립니다.
목계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새재](1979년)
#. 신경림 시인(1936년생 ~ 2024년) : 충북 충주 출신으로 1956년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 ‘시골의 흙냄새와 땀냄새, 거기에 한(恨)과 의지가 짙게 풍긴 민중시’를 쓴다는 평을 받으며, 사회가 불합리 부조리하게 흘러간다고 여기면 외면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냄
<함께 나누기>
대학 입학했을 때 시인의 [농무]가 나왔지요. 시론 가르치는 교수님이 이 책을 들고 들어오시더니,
"시다운 시 시집다운 시집 시인다운 시인이 드디어 나왔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해설 읽기 전에 이 시를 두 번은 더 읽은 뒤 아래 글 읽으시기를... 오늘 시는 신경림 시인의 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시입니다.
보통 우리들은 읽기 좋고 단숨에 팍 들어오는 시를 좋아합니다. 이 시는 그런 점에서 시조처럼 4음보 율격을 지켜 읽으면 혀가 잘 돌아갑니다.
이 시를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노래하는 도교적인 탈속의 분위기를 풍긴다 하여 읽는 분이 꽤 된답니다. 실제로는 전혀 다른 시이건만.
김춘수 시인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꽃」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은 이성에 대한 사랑 노래한 연시(戀詩)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존재의 본질과 의미, 그리고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을 탐구하는 시이건만.
시인의 고향인 충주 목계나루는 남한강 중상류의 물길 교역이 아주 활발하던 시절 그 지역 대표 나루터였습니다. 뗏목이 머물고 황포돛대가 올라와 물품을 풀어놓는 나루터에 장이 발달하였는데 그 가운데 4일과 9일에 서는 5일장인 목계장과, 목계장터가 시의 배경입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하늘과 땅이 화자더러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라 하지만, 사실은 화자가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싶었겠죠. 우리 인식 속엔 하늘과 땅은 고정돼 있으나 구름과 바람은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존재입니다.
오고 가는 이들이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나루터'와 그 주변에 형성된 장날이면 왁자지껄 사람들로 붐비는 '장터'와 통하는 시어입니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청룡 흑룡은 비구름 모습을 비유한 시어입니다. 비구름이 이리저리 하늘을 어지럽히며 떠도는 모습이 마치 용이 용트림함과 같다고. 잡초가 서민을 가리킨다면 큰 힘은 못 될지언정 그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작은 바람이라도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박가분 파는 /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박가분(朴家粉)'은 일제 강점기인 1916년에 상표 등록하여 판매한 최초의 화장품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방문판매 했던 상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방물장수’는 주로 여자에게 쓰이는 화장품과 장식품, 바느질 도구 및 패물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물건을 팔러 다니는 행상입니다.
그런데 이 방물장수는 전통사회에서 일종의 ‘이야기꾼’이었습니다. 즉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걸 구수하게 엮어내는 입담을 지닌 존재. 서민들의 애환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고, 그 이야기들을 이곳저곳에 전파하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방물장수’가 되고 싶다 함은 서민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그들과 애환을 함께 하는 이야기꾼이 되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목계장터, 구름, 바람, 방물장수... 이들은 전혀 다른 존재를 가리키는 듯하지만, 서로 함께 연결됩니다. '떠돌이, 자유, 서민, 애환'이란 묶음으로.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이 시에서 참 이질적인 부분입니다. 두부 만들 때 콩물이 끓어오르면 찬물을 갖다 붓듯이, 뭔가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지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임을. 개구리도 멀리 뛰기 위해선 뒤로 몸을 한껏 젖히지 않습니까.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마지막 시행은 첫 부분을 반복하는 듯하면서 살짝 변화를 주었습니다. 즉 바람은 '유랑'의 이미지를, 잔돌은 '정착'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이를 '정착하고 싶지만 떠돌이로 살 수밖에 없는 민중의 애환'을 보여준다 식으로 해설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산이 잔돌이 되라'에 주목해 산의 수많은 바위를 놔두고 잔돌이 되라 함엔, 산을 이룸에는 큰 바위도 역할을 하지만 잔돌 하나하나도 중요하다고 보아 바로 잔돌 그 자체가 소시민을 가리킴으로 새깁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굳이 해설에 신경 쓰지 말고 읽다 보면 '참 좋은 시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겁니다. 어떤 시는 해설에 매이지 않을 때 더 나은 감동을 가져다주기도 하니까요.
*. 사진 두 장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