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20)
제120편 : 고경숙 시인의 '모던 하우스'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y 22. 2024
@. 오늘은 고경숙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모던 하우스
고경숙
고가사다리 꼭대기가 15층 창문에 턱을 걸고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다리를
반복적으로 흔들면서 ‘취급 주의’를 당부했다
마당을 들고 오던 노모가 저지당하고
방2가 되었다
사내아이는 자청해서 방3이 되었다
평면적이 아닌 체적에 잔금을 치른 안주인은
방마다 문을 열어젖히고 취향대로
핑크, *아이스블루, 베이지 등 공기에 색을 입혔다
라벤더 향도 추가했다
거실이 광장이지?
활짝 열린 밸브는 흥분상태로
원탁에 구성원들을 불러 모았다
화목하게 화목하게 밥을 먹었다
비밀번호를 여러 번 고쳐 누르고 반입된
방1이 밤늦게 합류했다
광장 바닥에 술에 취해 엎어진 채로,
안주인은 팔짱을 끼고 내려다봤다
방1의 손을 잡고 방2가 안타까워했다
날바닥에서 이러면 병 나,
비죽 고개 내민 방3이 밀실로 퇴장했다
광장엔 비둘기 한 마리 날지 않았다
골목같이 축 늘어진 방1의 몸이, 시계가,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 [허풍쟁이의 하품](2021년)
*. 아이스블루 : 담청색 또는 녹청색
#. 고경숙 시인(1961년생) : 서울 출신으로, 2001년 계간 [시현실]을 통해 등단. 현재 부천에서 생활하며 부천 시문학계를 이끌며 ‘철의 여인’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열심히 생활함
<함께 나누기>
‘모던 하우스’는 아파트를 포함한 현대적인 주택, 즉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 주택으로 번역됩니다. 구조와 건축자재와 실내 인테리어가 이전과는 다르게 세련되고 편리하고 품격을 갖추었다는 뜻으로.
그렇다면 모던 하우스는 참 좋은 주택 형태인데 이 시를 읽고 나면 ‘어, 아닌데!’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모던 하우스’란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다분히 비트는(풍자) 시로 봐야 합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오늘 시는 한 가족의 이사 첫날의 모습을 독특한 방식으로 썼습니다. 아마도 고층아파트의 15층에 이사 오는 듯. 첫 부분 ‘고가사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다리를 반복적으로 흔들면서 취급 주의를 당부했다’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고가사다리를 사람에 비유한 의인화한 표현이라서가 아닙니다. 읽다 보면 이삿짐이 고가사다리에 위태롭게 흔들리며 오르내리는 장면을 마치 곁에서 보는 듯이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마당을 들고 오던 노모가 저지당하고 / 방2가 되었다”
‘마당을 들고 오다’는 표현, 아주 참신합니다. 노모는 아파트가 싫고 마당 있는 집을 원했지만 묵살당하고 방2에 갇히는 삶이 됩니다. 두 번째 방에 살면서 노모는 집안 어른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단순한 방2 지킴이로 변했습니다.
“안주인은 /방마다 문을 열어젖히고 취향대로 / 핑크, 아이스블루, 베이지 등 공기에 색을 입혔다”
이 집에서 고층아파트 즉 모던 하우스로 이사함을 즐기는 사람은 안주인뿐인 듯합니다. 아주 신이 나 마음에 드는 빛깔로 꾸밉니다. 라벤더 향도 추가하고 ‘거실이 광장이지?’ 하며 흥분상태로 가족 구성원들을 불러 모읍니다.
“화목하게 화목하게 밥을 먹었다”
아마도 독자라면 누구나 여기서 ‘화목하게’ 뜻과 두 번이나 반복함에 나름대로 해석 내리리라 봅니다. 화목하게 밥을 먹었다 함은 이사 첫날이건만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식사했다는 뜻과 함께 안주인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음도 포함합니다. 그러니 겉으로만 화목한.
“비밀번호를 여러 번 고쳐 누르고 반입된 / 방1이 밤늦게 합류했다”
‘방1’은 남편입니다. 비밀번호를 여러 번 고쳐 눌렀다와 술에 취해 엎어졌다는 표현에서 남편도 그다지 이아를 좋아하는 투가 아닌 듯. 방1인 남편, 방2는 시어머니, 방3은 아들. 그럼 안주인은? 안주인은 방이 없다가 아니라 세 개의 방을 모두 통제하는 절대자입니다.
“방1의 손을 잡고 방2가 안타까워했다 / 날바닥에서 이러면 병 나”
어머니는 술에 취해 바닥에 잠든 아들을 보며 안타까워 한마디 합니다. 아들의 심정을 다 안다는 뜻으로. 아마도 이들 가족은 도시 변두리 마당 있는 집에 살다가 안주인의 재테크에 힘입어 고급 아파트로 이사 온 듯. 그러니 안주인의 힘이 절대적.
“광장엔 비둘기 한 마리 날지 않았다”
비둘기가 아파트 놀이터나 공터에 머물면 똥을 싸고 먹이 활동하느라 지저분합니다. 허니 고급 아파트에선 절대 원하지 않는 일이지요. 허나 화자에게 비둘기는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합니다. 비둘기조차 찾아오지 않는 모던 하우스라면 끔찍하다는 투로.
아파트에선 이웃끼리 만나도 ‘OO 엄마’ 대신 ‘2012호’ ‘3111호’ ‘1912호’ 등으로 부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렇듯 가장을 '방1', 어머니를 '방2', 아들을 '방3' 하며 기호(숫자 포함)로 인식함은 우리 사회의 메마른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모던 하우스는 정말 ‘모던’할까요? 저는 흙 밟고, 흙 만지고, 흙 느끼며 산 지 이십 년쯤 되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거기 사시는 분들 정말 모던하다고 생각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