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노루가 고개를 넘어갈 때 잠시 돌아보듯 꼭 그만큼이라도 거기 서서 기다렸어야 했네 그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해가 진다고 서쪽 벌판 너머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네 새벽이 멀다고 동쪽 강을 건너가지 말았어야 했네 밤을 기다려 향기를 머금는 연꽃처럼 봄을 기다려 자리를 펴는 민들레처럼 그때 그곳에서 뿌리내린 듯 기다렸어야 했네 어둠 속을 쏘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을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헤매 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봄처럼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아무리 급해도 내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어제로 돌아갈 수 없네 시간이 가고 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그때 나는 거기 서서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2014년)
#. 안상학 시인(1962년생) : 경북 안동 출신으로,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안동을 글감으로 한 「안동소주」, 「안동식혜」, 「간고등어」란 시를 펴내 ‘안동 촌놈’으로 불림 애써 꾸민 흔적 없이 무심히 적어간 산문처럼 쓰면서도 그 무게감과 깊은 울림이 예사롭지 않다는 평을 들음
<함께 나누기>
1977년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그녀를 기다렸는데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보이지 않아 자리를 떴습니다. 처음 30분이 지날 때까지만 와도 ‘지각을 탓하지 않으마’,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지금이라도 와서 늦게 온 핑계만 제대로 되면 그냥 묻어두리’. 두 시간이 지나 자리를 뜨면서 이렇게 속에다 대고 중얼거렸죠. “앞으로 너와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훗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자신에게 약속한(?) 그 못된 자존심을 지키려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조금 긴 시이지만 읽는데 무리는 없으리라 여깁니다. 마치 우리가 한 번쯤 이런 잘못을 범하고 뉘우친 적 있을 법한 내용이기에. 그래서 읽고 나면 다시 한번 앞으로 돌아가 찬찬히 새기면서 두 번 읽게 만드는 힘을 가진 시입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의 피치 못할 사정을 살피며 기다렸어야 했건만. 조금만 더, 날이 춥더라도, 밤이 깊어지더라도, 올 가능성이 없어 보이더라도, 아주 짧게나마 조금만 더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래도 오겠지 하는 미련을 갖고, '그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를 기다렸어야 했건만. 허수아비가 바람에 흔들리지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마을 입구에 자리한 장승처럼 우두커니가 되어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정작 그 사람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습니다.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나를 찾아왔건만 나는 거기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거기 붙박여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가 찾아오리란 믿음을 갖고.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돌아왔을 때 정작 나는 없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 기다리지도 이해하지도 배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이만큼 했으니 내 의무를 다 했잖아.’ 하고 시건방 떨 뿐 진정한 배려와 이해는 없었습니다.
이 시는 기다리지 못해 사랑을 잃고 그 아픔을 노래한 연시(戀詩)로 봅니다. 그 사람을 ‘연인’으로 본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봐도 될 테고, 또 그 사람을 ‘기회’ ‘순간’으로 보아 놓쳐선 안 될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시로 봐도 됩니다. 이 시에서는 특히 '직유법' 사용이 아주 많습니다. 보통 시에서 직유법 남발은 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에 피하는데 오늘 시는 오히려 화자의 진정성을 높여줍니다. 즉 직유법이 시적 상황과 절묘하게 연결되고, 문맥에도 매끄럽게 이어져 시 읽는 맛과 여운을 돋우니까요.
닿을 듯 말 듯 결코 닿지 않았던 그 사람, 조금 더 기다렸다면 우리는 함께 할 수 있었을까요?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가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함은 둘의 인연 부족이 아니라 내 인내심의 부족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앞으로 기회가 온다면 (오지 않겠지만) 눈보라 몰아쳐도 태풍이 불어도 한번 끝까지 기다려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