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으로 설거지를 하며 내 무거운 *업록(業綠)을 만들어 마음 아프게 한 이들의 아픈 마음을 설거지한다.
한 손으로 설거지를 하며 지나온 *유형(流刑)의 세월 어느 길목에서던가 쩔뚝발이 내 육신에 침을 뱉고 나를 손가락질하고, 나를 비방하고 나를 욕하고 나를 배신하고 나를 중상모략한 이들의 마음을 사랑하고 어여삐 여겨야겠다고 생각느니 그들을 미워하고 원망한 내 못난 마음을 설거지한다.
그 부처님들이 나를 욕하고 나를 비방하고 나를 손가락질하고 나를 못마땅히 여기고 나를 배신한 덕으로 얻은, 기쁨이 계셨을 테니 어떤 행복이라도 얻으셨을 테니 그 부처님들께서 나를 공양(供養)한 셈 아니랴.
그로 하여 나를 *회향(回向)할 틈을 주신 그 고마우신 부처님들을 사랑하고 어여삐 여길 마음이 되게 내 못난 마음을 설거지한다. 내 *업장(業障)을 녹여 주신 그분들의 눈길 손길 마음길 이 얼마나 고맙고 기쁜 일이랴.
한 손으로 설거지를 하며 밥알을 털어내듯 밥알처럼 달라붙은 탐욕을 설거지한다. 파잎 쪼가리를 떼어 내며 어리석은 마음 한 잎 설거지한다. 고춧가루 헹궈 내며 홧덩이 마음 조각을 설거지한다. 행주를 헹구며 너덜너덜한 가슴을 설거지한다.
한 손으로 설거지를 하며 반쪼가리 영혼의 아픔, 슬픔, 외로움의 찌꺼기들을 설거지한다. - [정토의 꽃](1998년)
*. 업록 : ‘업의 잎’이란 뜻(?)으로 보이며, '업'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 *. 회향 : ‘회전취향(廻轉趣向)’을 준말로 자기가 지은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일 *. 유형 : 유배와 비슷한 말 *. 업장 : 악업에 대한 장애
#. 랑승만 시인(1933년 ~ 2016년) : 인천광역시 출신으로 1956년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 한국잡지기자협회 회장, [주부생활] 편집부장 등을 역임하다 1980년 1월 25일 한국잡지협회 이사회 참석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구가 됨. 그런 몸으로 아내마저 없는 황량한 세월을 두 아들 돌보며 살아야 했던 인천의 큰 시인은 무려 36년을 투병하면서 시를 씀. 시인 시 읊으면 아들이 받아 적어 어렵게 완성시켜 한 편 두 편 모아 펴낸 시집이 십여 권.
<함께 나누기>
시는 꽤 긴 편인데 다행히 읽으면 쉬 이해됩니다. 제목 그대로 한 손으로 설거지하며 느낀 감정을 표현한 시. 다만 ‘한 손으로’란 시어가 신체 한쪽이 마비돼 한 손으로밖에 설거지할 수밖에 없으니 읽는 이로 하여금 먹먹하게 만들지요. 또한 설거지는 진짜 설거지를 가리키면서 한 연 한 연 펼쳐질 때마다 마음의 설거지로 확장되어 나갑니다.
한 손으로 설거지하면서 ‘닦아 내야 할 게 많은 내 마음’을 설거지하고, 내 잘못으로 하여 ‘마음 다치게 한 이들의 아픈 마음’을 설거지합니다. 나를 비방하고 나를 중상모략한 이들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건만 오히려 ‘그들을 미워하고 원망한 못난 마음’을 설거지하고, 밥알처럼 달라붙은 ‘탐욕’을 설거지하고, 어리석은 마음과 홧덩이 마음을 설거지하고, 너덜너덜한 가슴을 설거지합니다.
특히 제 눈에 들어온 자기를 욕하고 비방하고 손가락질한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비유하며, '그 부처님들께서 나를 공양한 셈 아니겠느냐. 그로 하여 나를 회향(回向)하도록 만들어 주심'에 감사한다는 구절, 여기 이르러선 단순한 생활인의 모습보다 수행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누구보다 심하게 몸부림치며 허덕여 온 힘든 삶이었지만 이를 초탈하려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