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선 장마 기간 중에 과일과 채소의 자람이 눈에 보일 정도로 활발하다. 하늘에서 햇빛과 물을 고루고루 선물하기에 그렇다. 작물 가운데서도 버팀대 없이 잘 자라는 게 있지만 버팀대가 반드시 필요한 게 있다. 예를 들면 고추, 오이, 토마토, 가지, 줄콩 등이다.
버팀대란 말 대신 ‘지지(支持)대’, ‘지주(支柱)대’란 말이 더 쓰이지만 순우리말 '버팀대'가 더 나아 이 말을 쓴다. 사실 평소에는 버팀대가 없어도 밭작물이 잘 견디지만 태풍에 가까운 센 바람 불 때나 폭우 쏟아질 때는 꼭 필요하다.
아주 예전에는 버팀대가 단순했다. 대나무로 만들었으니까 모양도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헌데 이도 세월이 가면서 진화(?)한 덕에 모양이 각각이다. 일률적인 형태보다 제 각각이니까 더 재미있고 보기에도 훨씬 낫다.
(헌 문짝을 활용한 오이 버팀대)
버팀대는 보통 그 고장에 나는 걸 이용한다. 일반적으로 대나무를 많이 쓰지만 그게 없으면 생나무가지를 잘라 쓰기도 하고, 헌 집 부수고 새 집 지을 때 나온 문짝도 좋은 재료가 된다. 이마저 없으면 돈 주고 산 철로 된 버팀대를 이용하지만.
버팀대 모양이 가지각색이나 거기엔 다 같은 농민들의 투박한 마음이 담겨 있다. 농민들은 부러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거기 있으니까 갖다 쓸 뿐. 기교를 부리지도 않는다. 되는 대로 갖다 꽂는다. 그러면 저절로 채소와 어울리는 하나의 작품이 된다. ‘기교 없음’의 ‘기교’라 할까.
(죽창을 연상케 하는 고추 버팀대)
조선시대 산수화와 인물화는 양반 귀족의 그림이었다면, 풍속화와 민화는 서민의 그림이었다. 거기에는 바로 민초들의 삶을 담았다. 이처럼 자연과 닮은 모습으로 어떤 의도 없이 만들어 세운 버팀대가 그들 삶과 일치된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가장 큰 의의는 전체적으로 보면 닮았으면서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고춧대만 보더라도 그렇다. 대나무 하나하나가 고추를 지탱하기도, 굵은 대나무를 이랑 양쪽에 박은 뒤 사이에 가느다란 시누대(신우대)를 넣기도 한다.
또한 고추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대나무를 사람 '人' 자 모양으로 얽어놓기도 있고, 그 모양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세우기도 한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구하기 가장 쉬운 재료를 이용해 뚝딱 만들어 세우면 된다. 그때 그분들은 자기가 만든 고춧대가 예술이라 여겼을까?
(쇠고춧대는 햇빛을 받으면 반사돼, 멀리서 보면 진짜 창검처럼 느껴짐)
오잇대도 마찬가지다. 대나무를 가지째 꺾어와 (잔가지 채로) 그대로 땅에 꽂아놓기도 하고, 고춧대처럼 두 줄로 사람 '人'자로 하늘 향해 받들게 하기도 하고, 솥발 모양으로 안정감 있게 세 개를 박아놓은 것도 있고, 길고 튼튼한 대나무를 박은 뒤 현수교처럼 줄을 길게 늘어뜨려 매달아 놓기도 한다.
잠시 본 것만 해도 이런데 세세히 둘러보면 얼마나 다양할 것인가. 또 고춧대 오잇대만 이렇게 다양한 게 아니다. 토마토도 가지도 (재배) 더덕도, 줄콩도 언뜻 보면 비슷비슷해 보이나 솜솜히 뜯어보면 세운 모습마다 작물 자람에 맞게 만들어져 서 있다.
달내마을에 들어와 처음 마을 한 바퀴 돌 때 그 모양의 다채로움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도시인의 눈엔 거의 외경에 가까웠으니까. 그때 분명 사진을 찍어놓았을 텐데 이번 내장하드 손실로 다 날아가고 없다. 안타까움은 곳곳에 묻어난다.
(시중에 파는 오이(왼쪽)와 줄콩(오른쪽) 버팀대로 보기엔 멋진데 확실히 소박미가 적음)
가만 보면 고추를 버텨주는 대나무 모습이 여러 가지를 연상케 한다. 어찌 보면 월드컵이나 올림픽 때 깃대를 들고 입장하는 선수단의 모습 같기도 하고, 또 달리는 부대 사열 중에 군인들이 높이 쳐든 총검으로 보이기도 하다.
허나 역시 대나무가 곧추 선 모습은 동학혁명 때 농민군들의 유일한 무기였던 대창으로 짐작해 봄이 보는 맛을 살린다. 고추 매운맛이 탐관오리의 폭정에 맞선 농민들의 매운맛과 통하고, 꼿꼿이 선 대는 백산에서 봉기한 농민군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플랜트 파티션(파티션 플랜트)’란 이름으로 정원을 예쁘게 꾸밀 때 쓰는 다양한 제품이 쏟아져 나온다. 그걸 보고 응용해 텃밭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기발한 아이디어 가미한 나만의 개성 담긴 버팀대를 만들어 설치해 봄도 나름 괜찮으리라.
(시중에 판매되는 파티션 플랜트들)
이제 웬만한 바람이 불어도, 억수같이 비가 쏟아져도 버팀대로 하여 고추, 오이, 가지, 토마토, 줄콩은 큰 흔들림 없이 잘 자라 주리라. 태풍만 오지 않는다면, 역대급이란 폭우만 쏟아지지 않는다면 충분히 견딜 정도로 농민들은 마음을 쓴다.
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솟아난 잡초 뜯으며 흐뭇하게 웃는 어르신들의 활짝 웃는 얼굴을 자주 보고 싶다. 그러려면 한꺼번에 쏟아지지 말고 적당히 비가 와줘야 할 텐데. 이미 가을 볕살은 따끈하게 저들을 익게 할 준비를 끝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