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진규 시인(1939 ~ 2017) :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현대시학] 주간을 맡았고, '몸시' '알시' 같은 산문시의 영역을 개척하는 등 시단에 활력을 불어넣다가 별세.
<함께 나누기>
몇 년 전 '망막박리수술'을 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망막이 찢어져 그걸 깁는 수술을 했다는 말이지요. 이 수술받으면 잠잘 때도 고개를 들어선 안 되고 엎드린 채 자야 합니다. 즉 무엇을 하든 고개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한 달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일이 참 힘들었습니다만 어쩝니까, 그래야 찢어진 망막이 붙는다는데. 고개 숙이고 다니면 단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소득 한 가지 얻었습니다. 고개를 숙이니 땅 위를 다니는 자잘한 게 보이더군요.
제가 전에는 대충 보고 넘겼던 개미, 지렁이, 달팽이, 청개구리의 생태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게 가장 큰 소득이랄까요.
시로 들어갑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린아이도 별과 달이 어두워야 빛남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허면 왜 시인은 서두에 이를 끌어왔을까요? 산골이라 하더라도 한여름 은하수를 보려면 불빛이 훤한 가로등 아래서는 불가능합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려면 어두워야 합니다. 그래서 보려면 일부러 가로등을 끕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행에 이르면 글벗님들은 ‘아!’ 하실 겁니다. ‘대낮’이 단순히 '밤'과 대조되는 일반적인 시어가 아님을. 잘 난 사람, 한참 깃발 날리는 사람, 떵떵 거리며 사는 사람, 부족함을 모르고 사는 사람, 남의 아픔을 보지 않는 사람...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어둠은 대낮의 반대가 되겠지요. 몸부림쳐도 살기 어두운, 뭘 해도 잘 안 되는, ‘갑’에게 짓눌려 살아야 하는, 자꾸만 바닥으로 쳐지는 삶. 그러면 별은 희망이나 꿈, 그리고 밝은 미래가 될 터. 우리네 삶이 줄창 어둠만 계속된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별이 뜰 날이 없다면.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지금 한창 깃발 날리는 사람들에게 저보다 못한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록 대낮이라도 볼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생깁니다. 지금 밝음 속에 사는 사람은 그 밝음에 취하여 참된 삶의 가치를 놓치고 있다고 시인은 단정합니다. 겉으론 밝아 보이나 실상은 어둡다고.
물론 시인은 ‘밝음보다 어둠이 더 낫다’라는 말을 하려 함이 아닙니다. 살아가며 누구에게나 어두운 시기가 올 텐데, 그때 좌절하지 말고 반드시 별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살아라는 뜻으로 새깁니다.
망막박리수술 뒤에 그냥 지나쳤던 미물들에 대해 짧은 눈길이나마 주려는 마음 생김도 수확이겠지요. 글벗님들도 한때 어둠에 머물렀던 적 있을 터이고, 그때마다 깨달음도 얻었겠지요. 그게 앞으로의 삶에 도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