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1편 : 양선희 시인의 '신비하다'
@. 오늘은 양선희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신비하다
양선희
이거 한쪽만 상한 건데
도려내고 드실래요?
가게 아주머니는
내가 산 성한 복숭아 담은 봉지에
상한 복숭아 몇 개를 더 담아준다.
먹다 보니 하, 신기하다.
성한 복숭아보다
상한 복숭아 맛이 더 좋고
덜 상한 복숭아보다
더 상한 복숭아한테서
더 진한 몸내가 난다.
육신이 썩어 넋이 풀리는 날
나도 네게 향기로 확, 가고 싶다.
- [그 인연에 울다](2002년)
#. 양선희 시인(1960년생) : 경남 함양 출신으로 1987년 계간 [문학과비평]을 통해 등단. 현재 원주에 살면서 시인으로, 소설가로, 방송작가로 열심히 생활함
<함께 나누기>
어릴 때 들은 얘기 가운데 ‘여자가 밤에 복숭아 먹으면 미인이 된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아내에게 물으니 그런 말 들은 적 있다고 합니다. 하필 밤일까? 그리 생각하다 예전에 낮에 복숭아를 먹을 때 거기서 벌레가 기어 나와 기겁한 일이 떠올랐습니다.
지금과 달리 약을 치지 않을 때라 어떤 때는 복숭아를 먹으려 집으면 하나도 성한 게 없었습니다. 그때 어른들은 생각했겠지요, 벌레 먹은 복숭아를 일일이 잘라내고 먹느니 그냥 먹여 고단백질(?)이라도 먹일 목적으로.
시로 들어갑니다.
“이거 한쪽만 상한 건데 / 도려내고 드실래요?”
과일농사, 특히 복숭아나무 한 그루라도 키워본 경험 있는 분이라면 절로 고개를 흔들 겁니다. 약 치지 않으면 단 하나도 먹을 게 없다고. 한쪽이 썩었다는 표현은 약을 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약을 적게 쳤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일부분만 썩었다면 먹을 만하지요.
“먹다 보니 하, 신기하다 / 성한 복숭아보다 / 상한 복숭아 맛이 더 좋고”
제가 과일 가운데 다른 과일엔 많이 약해도 뽕나무 열매인 오디에 관한 한 고수라 자부합니다. 적어도 일 년에 200kg 이상 수확한 지 20년이나 되었으니까요. 오디 가운데 가장 맛있는 녀석은 작은 새가 콕 찍어 상한(?) 오디. 그 오디는 표가 납니다. 물러터져 떨어지기 직전이니까요.
토마토도 새가 찍은 흔적 있으면 훨씬 더 단맛 납니다. 우박 맞아 상처 난 사과가 성한 사과보다 더 맛있고... 화자의 입에도 성한 복숭아보다 상한 복숭아가 더 맛이 나나 봅니다. 참 이상하지요, 상한 게 성한 것보다 더 맛있다니.
“덜 상한 복숭아보다 / 더 상한 복숭아한테서 / 더 진한 몸내가 난다”
바로 앞 시행 ‘먹다 보니 ~ 맛이 더 좋고’와 이어지는 시구입니다. 다만 맛 대신 ‘진한 몸내(몸 냄새)’로 바뀌었을 뿐. 시인은 복숭아의 살에서 사람의 살을 떠올립니다. 하기야 복숭아 빛깔이 살색(요즘엔 ‘살구색’)에 가까워서만은 아닙니다. 사람다운 내음은 아무 상처 없이 자란 사람보다 상처를 이겨내 상처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더 짙게 난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육신이 썩어 넋이 풀리는 날 / 나도 네게 향기로 확, 가고 싶다”
이제 우리는 시인이 상한 복숭아를 상한 영혼에 비유했음을 압니다. 상처 난 영혼은 아무런 시련 없이 성장한 영혼보다 더 강합니다. 원숙이란 말이 여기 어울리지요. 원숙(圓熟)의 원래 뜻은 둥글게 잘 익었단 말이지만 상처 없음이 아니라 모진 세월 다 겪어 둥그스름하게 변했다는 뜻이 더 강합니다.
수밀도(水蜜桃)란 복숭아 품종이 있습니다. 중국 원산인 껍질이 얇고 살과 물이 많으며 맛이 단 복숭아를 가리킵니다. 복숭아벌레는 수밀도에 가장 잘 파고듭니다. 수밀도가 제 몸속 깊이 들어앉은 벌레를 내치지 않고 집으로 내어줍니다.
벌레에게 집을 내어준 수밀도는 덕분에 더욱 단맛을 얻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안타까울지 몰라도 복숭아로썬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우린 몸에 병이 들어오면 내쫓으려 온갖 약을 다 먹습니다. 헌데 쉽사리 내쫓기던가요, 오히려 다른 병을 몰고 오지 않던가요.
시는 자기에게 다가온 소리로 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시는 부모 덕으로 근심 없이 자란 사람보다 삶의 상처로 터지고 곪아도 그걸 이겨낸 사람이 더 이름다워 보인다고. 그리 읽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