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편 : 정끝별 시인의 '세상의 등뼈'
@. 오늘은 정끝별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세상의 등뼈
정끝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 [와락](2008년)
#. 정끝별 시인(1964년생) : 전남 나주 출신으로 1988년 [문학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가로 등단. 현재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제23회 [소월시문학상] 수상할 정도로 좋은 시를 많이 씀
<함께 나누기>
제가 이쁜 이름을 이야기할 때 꼭 예로 드는 사람이 바로 정끝별 시인입니다. 시인의 아버지가 ‘끝내는 (마지막엔) 별이 되어라’라는 뜻으로 지어줬다는데... 저는 제 이름에 대한 불만이 아주 큽니다. 대학 1학년 민속학 수업 때 이름의 뜻이 ‘점바치(점쟁이)’임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지금처럼 이름 바꾸기가 쉬웠다면 바꿨으련만. 요즘 들어 문득 왜 저는 제 이름대로 살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유명 점바치가 되어 ‘천공’이나 ‘건진’처럼 한 나라를 쥐었다 폈다 하거나, 영도 청학동 모모 점바치처럼 떼돈 버는 거물이 됐을지 모르는데...
‘대준다’는 말이 여자분들은 어떨지 모르나 남자들에게 좀 상스러운 낱말입니다. 성적인 농담이므로. 허나 시인은 이 '대준다'는 말로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그걸 밑천 삼아 일으켜 세워 삶의 등뼈가 되도록 해준다로 만들었습니다.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시에 쓰인 시어에는 그 시인만의 창의적 표현이 담깁니다. 오늘 시에서 ‘대주다’도 그렇습니다. 힘들어하는 나에게 의지가 되는 역할로써 ‘대주다’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흔들림을 바로잡아 주는.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내게 힘이 되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나 또한 누군가에 힘이 되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그럴 때 필요한 말이 ‘내 전부를 들이밀다’입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너의 가능성 하나만을 믿고 너를 일깨우며 네가 일어설 때까지 등뼈가 돼 주는 일입니다.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목말라하는 이에게 물을 대주듯이, 슬픔에 힘들어하는 이에게 손수건 내밀듯이, 절망하는 이가 끝 모를 밑바닥에 떨어질 때 그 밑을 대주는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밥이 되고 싶습니다.’ 여기엔 밥은 생명의 원천이요, 밥을 대줌은 그의 등뼈가 되어 꼿꼿이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는 말 대신' '밥'이 돼 줘라' 이 메시지를 저는 시인이 가장 힘줘 쓴 시행으로 봅니다. 그냥 입으로만 '사랑한다'는 말보다 실제적으로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너의 밥)이 더 중요하다고.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가 등뼈를 대줌으로 하여 삶을 여태껏 지탱해 온 지 모릅니다. 나의 노력과 애씀 이전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사랑으로, 지지와 응원으로 이만큼 생을 유지해 온 것일지도. 등뼈가 돼 준 이의 헌신으로.
'품'과 '돈'과 '입술'과 '어깨'를 대주는 누군가의 등뼈가 없었다면 우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을까요? 이를 깨닫는다면 나도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품'과 '돈'과 '입술'과 '어깨'를 대주는 등뼈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