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8편 : 문정영 시인의 '그만큼'
@. 오늘은 문정영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그만큼
문정영
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돌멩이 생김새만 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발 크기가 비어 있다.
내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 키는 다 젖었고
걸어온 자리만큼 말라가고 있다.
누가 나를 순하다 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
후박나무 잎은 후박나무 잎만큼 젖고
양귀비꽃은 양귀비꽃만큼 젖어서 후생이 생겨난다.
여름비는 풍성하여 다 적실 것 같은데
누운 자리를 남긴다.
그것이 살아가는 자리이고
다시 살아도 꼭 그만큼은 빈다.
그 크기가 무덤보다 작아서 비에 젖어 파랗다.
더 크게 걸어도
더 많이 걸어도
꼭 그만큼이라는데
앞서 빠르게 걸어온 자리가
그대에게 먼저 젖는다.
- [그만큼](2014년)
#. 문정영 시인(1959년생) : 전남 장흥 출신으로 1997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광주일보]와 함께 운영하는 ‘동주문학상’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계간 [시산맥] 발행인
<함께 나누기>
어느 글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같은 절에서 계를 받은 두 스님이 갈라져 나와 도를 닦다가 한쪽 스님의 연락으로 둘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갑스님’이 ‘을스님’ 머무는 곳을 찾아가니 그곳은 이름난 큰 절의 주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시사철 신자가 들끓고 입장료도 많아 엄청 부유하게 보이는데, 음식도 고급스럽고 시설도 멋진 절에서 대접받은 뒤 헤어지려 밖에 나오자, 큰절 을스님이 대웅전 앞에 나와 자랑스럽게 손가락으로 절 전체를 휘두르며 설명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내가 머무는 절이라네. 한시도 조용할 날 없지만 신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니 대단하지 않은가?”
그 말에 갑스님이 뭐라 답하고 싶은데 차마 하고픈 말을 삼킨 채 “좋네.” 하고 끝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번엔 을스님이 갑스님의 절을 찾았습니다. 그곳은 차로 갈 수 없는 산중턱에 자리 잡아 30분은 걸어 올라가야 이를 수 있는 곳입니다. 헉헉거리며 겨우 도착한 뒤 보니 너무 작고 곧 쓰러질 듯하여 을스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이렇게 좁고 불편한 산골짜기에서 어떻게 생활하니?”
이 말에 갑스님이 답했습니다.
“이 절엔 신자 대신 저 아래 나무와 풀과 새들이 다 불공드린다네. 게다가 가끔씩 부처님이 오셔서 저들과 얘기 나누면 그리도 보기 좋다네.”
시로 들어갑니다.
“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 돌멩이 생김새만 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그렇지요. 비 그친 뒤 돌멩이 들어내면 그 아랫부분은 말라 있지요. 크기도 딱 맞게 돌멩이 그만큼입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서 있던 자리에도 내 발 크기만큼 비어 있습니다. 아무리 심적으로 육적으로 성장해도 내 발 크기만큼만 비어 있을 뿐.
“누가 나를 순하다 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
가끔 남들이 나를 두고 저 사람 어떻다고 합니다. 나 역시 남을 두고 어떻니 저떻니 평가합니다. 자 그럼 나나 남이 보는 그 평가는 옳을까요? 겨우 내 눈에 잠깐 보인 그 모습만 갖고 그를 단정 짓지는 않는지요? 특히 남들에게 보이는 가식적인 면만 보고서.
“후박나무 잎은 후박나무 잎만큼 젖고 / 양귀비꽃은 양귀비꽃만큼 젖어서 후생이 생겨난다”
모든 나무는 그 주변에 내린 비로 수분을 섭취합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100m 200m 떨어진 개울의 물은 끌어당길 수 없습니다. 여름비가 풍성하여 주변을 다 적셔도 그가 누울 자리만 남깁니다. 그것이 살아가는 자리이고 다시 살아도 꼭 그만큼만 빕니다.
“더 크게 걸어도 / 더 많이 걸어도 / 꼭 그만큼이라는데 / 앞서 빠르게 걸어온 자리가 / 그대에게 먼저 젖는다”
내가 그만큼 먼저 걸어가 딴 사람이 차지한 자리를 확보하려 해도 나의 목표치는 그만큼 먼저 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욕심내 그만큼을 넘어서려 해도 언제나 그만큼은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이제 시인이 시에서 말한 '그만큼'을 생각해 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거리를 그만큼 지켜라.’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몫만을 차지할 뿐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버리라.’라는 뜻 같기도 합니다.
뒤에 방점을 두면 ‘그만큼’이란 말엔 그 사람이 지닌 재산, 철학, 양심, 욕망 모두를 포함한 말이 되겠지요. 돌멩이는 돌멩이만큼의 흔적을 남기고, 후박나무 잎은 후박나무 잎만큼 남기고, 양귀비는 양귀비만큼 흔적을 남깁니다.
앞에 예로 든 두 스님 가운데 그가 지닌 '그만큼'의 크기를 가늠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요. 내가 좀 더 소유하고 싶으면 그만큼의 크기는 작아지겠지만, 내가 좀 더 베풀기로 하면 그만큼의 크기는 불어납니다.
그렇다면 ‘그만큼’의 크기를 만드는 사람이 어떤 자세로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하겠습니다. 그 사람의 크기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만큼의 면적만 남기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