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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Feb 14. 2023

자화상

누구에게나 답하기 쉽지않은 질문이 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나는 누구인가?


이제 생각해보니 어릴적 괴담중 비슷한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내용은 아마 화장실 거울이나 거실의 전신 거울 속의 자신과 대면하고, 거울속의 자신의 눈동자를 10초간 마주친다. 그런 다음 ‘너 누구야’라고 10번이었나?.. 30번이었나? 말하면 거울 속 그 누군가가 대답한다는 내용이었나 그랬다. 정확하지는 않다.

여하튼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세 가지 고민들에 사로잡혔다. 이 고민들은 겁 없이 내질렀던 우당탕탕 내 삶의 선택에 중요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런 질문의 끝은 항상 어렴풋한 공허인데, 아마 공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이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으면 속으로 손을 들어불 수 있을까? 난 사실 주변에서 그런 비슷한 얘기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조차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잘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신기해한다. 왜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할까 아니면 이런 고민 없이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왜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누군가에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그런 얘기를 들어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에도 비슷한 순간이 나오는데 “네가 푸쉬킨이나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작가들보다 더 유명해질 것이라고 하자. 하지만 그게 뭐 어쨋다는 것이냐?”라는 대목을 시작으로한 자신의 정지되어 버린 삶에 대한 고찰이다. 


그래, 톨스토이는 적어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구나


20대 후반의 우리집은 ‘예술촌’이라는 곳에 위치한 조그만 마당이 있는 2층 집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 아마 엄마가 삼촌말을 듣고 덜컥 구입한 집이었다. 한적한 시골에 파란 하늘과 총총 별이 떠다니는 곳이지만 어느새 집 값이 떨어져서 엄마가 손해를 보고 팔았다고 했다. 이제는 슬프게 다시 그 집에 갈 수 없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나는 명절때나 뭔가 여유가 생기면 예술촌 집으로 갔었다. 거긴 아무도 살지 않는 야산의 중턱에다가 10여채의 집을 지어 놓고는 마을처럼 만들고 길을 닦아놓은 곳이다. 들어가는 길에는 누군가의 집에서 키우는 개들이 마구 짖는데다가 목줄도 안해 놓아서 입구부터 괜히 주뼛거리면서 주변을 경계하게된다.

슬며시 언덕을 올라가서는 똑같이 생긴 주택들 속에서 우리집을 찾는다. 주변은 한국의 흔한 시골 풍경 답게 산들과 숲이 넓게 펼쳐져 있다. 허허벌판이기도 하고, 배달음식같은건 시킬 수 없는 지역이다. 


그곳의 거실 한복판에 나는 혼자 누워 있었다. 아무도 없었고, 불도 끈 상태여서 주변은 칠흑같이 깜깜했다.

선사시대에는 그런 깜깜함이 익숙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은 차가웠고, 거스를 수 없는 파도처럼 슬며시 슬며시 또 다시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개구리 울음같은 소리, 고양이 울음 소리가 어렴풋이 멀리 있는 듯도 하고, 그러다가 그런 소리가 정말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디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또는 들리지 않는지 나는 어느새 방향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엎어져 있었나 비틀어져 있었나 아니 어쩌면 나는 꼿꼿히 서있을 수도 있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촉촉한 무엇이 말라간다. 감각이 점차 사라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주 공간이라고해도 이 보다는 많은 빛이 보일 것이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내가 어느새 살아온지도 벌써 30년 이상이 흘렀다. 누군가를 붙잡고 인터뷰 해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당신은 죽을텐데 왜 살고 있나요?” “당신은 죽고, 우주보다 더 깊은 공허 속에 빠지게 될건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왜 우리는 태어남을 축하하고 죽음을 애통해하는지 아시나요?”, “죽음 속에서 행복했을텐데요, 아쉽게 태어나고 말았군요..”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 정말로 실감하지는 못하는것 같다.


죽음도 대비할 수 있을까?


세월호, 이태원 같은 사건들을 접하면서 아마 그렇게 삶의 마지막이 내게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기 위해 또는 무엇을 남기기 위해 각자의 철학에 따라 열심히 노력한다. 미안하지만 그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책이나 과학 교과서에 누군가의 이름이 대문짝처럼 실리는게 대단하게 느껴지는가? 얼마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반 고흐의 삶이 불행하다고 하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수 많은 영광을 누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것은 없을 것이다. 한 예술가의 고뇌로 가득찬 아름다운 최후는 그가 아니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제 2의 반고흐가 되어서 평행세계의 어느 곳에서 미술 교과서를 가득 채울지도 모른다. 그런 세계가 있다면..


그러면 어떡하라고,,! 그렇지만 나는 무언가 알아내고 싶었다. 그래도 살고 싶었다. 그것도 잘..!

키워주신 엄마가 눈에 아른거리고 친구들과 누나들도 나를 묵묵히 응원해주는데.. 뭔가가 있겠지 어딘가에는 무언가 있겠지 정답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결론이라도 내고 싶었다.

그래서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 공대를 전공한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분야기도 하고, 중고등학교때 내신점수는 거의 바닥을 칠 만큼 재능이 없는 분야였지만, 내면의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는 무언가 있지 않을까?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면 감정과 감성으로는 뭔가 다른게 있지 않을까?


인생은 Birth와 Death사이의 Choice라고 하는 말이 있다. 선택은 아름다운 과정이다 아름다운 미련이다. 추억은 바래지고 감정은 남는다. 감정은 사그라들고 가슴에 묻었다가 갑자기 분출하듯 폭발한다. 그리고는 없다.

기억들 속에서 죽음을 느낀다. 할머니가 사라져간다, 아빠가 사라져간다. 엄마도 점점 사라져간다. 하지만 어디선가 누군가의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태어난다.

나는 삶의 미련을 잔뜩 남기기는 하지만 나만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나는 공허로 가지만 다행인 점은 공허에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태어난지 얼마 안된 친구들은 어머니의 자궁 속 기억이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런 기억은 잊은지 오래이고, 그 이전의 기억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해보려고 끙끙거려도 말이다.


내면의 감정을 바라본다, 생명의 비밀을 알아낸다, 외국으로 이민을 준비한다, 인공지능을 공부한다, 나무를 자르고 벽에 페인트칠을 한다. 이 삶은 조금 독특하지만 평범한 한 인간의 삶이다. 나는 이렇게 죽음을 대비하고 있다. 당신은 죽음을 대비하고 있는가?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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