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는 글을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병역을 18개월 보충역(방위)으로 보내고, 바야흐로 전역(소집해제)을 한 달 남짓 남긴 시점이었다. 전역자 집체교육을 받고 있던 기간이었고 시간적,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널널했던 때로 기억이 된다.
고등학교 동기였던 친구가 전화가 왔다.
" 얼굴 좀 보자! "
비록 군인 신분이지만 출. 퇴근하는 귀하신 몸이다 보니...
퇴근 후 친구의 집에 잠시 들렀다.
나를 본 녀석이 반가운 얼굴로 그리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 책 독후감으로 리포트 써서 내야 하는데, 나 내일 학군단 훈련 때문에 입소하거든... 이거 읽고 독후감 좀 써죠! 훈련 끝나고 제출할 거니까, 한 달 정도 여유 있어! 부탁 좀 하자!"
말은 부탁인데, 억양이나 말투는 완전 강요다.
한 200페이지 정도 될까...
책의 제목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문학 책이었는데, 제목과 저자는 내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무역(貿易)과 통상(通商)이 이 친구의 전공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독후감 제출을 요구한 서적은 전공과는 거리가 좀 있어 보였다.
비록 공돌이 친구이지만, 전공 서적도 아니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 보이니 어려움을 무릅쓰고 부탁한 것으로 이해했다.
" 오케이! 한 번 써보지 뭐! "
아주 호기롭게 허락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집에 들고 와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가, 들고 다니던 가방에 넣어가지고 부대로 출근했다.
말이 전역자 집체교육이지, 사단 전체의 전역자를 한 군데 모아놓고 교양강좌 수준의 강의를 하였다. 그러니 여기저기 수군대며 잡담하는 병사가 있는가 하면, 코를 골며 자는 인간도 몇몇이 있었었고, 나도 강당 뒷자리에 최대한 몸을 낮추고 앞사람을 엄폐물 삼아 문제의 서적을 가방에서 꺼냈다.
중. 고등학생 시절 폐품으로 가져온 빨간책을 선생님 모르게 펼쳐보는 짜릿함을 느끼며, 책을 펼치는 순간...
까만 것은 활자요, 흰 것은 종이인지라...
도무지 무슨 얘기인지, 내가 도통 이해 못 할 문장으로만 쓰여 있는 책이란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이 죽일 놈이 나를 엿 먹이려고 이 책을 주었구나! "
그러나 친구에게 오더를 받았으니, 나를 믿고 열심히 성실하게 군사훈련에 임하고 있는, 소위 연병장을 박박 기고 있을 친구를 상상하면서 나도 전의(戰意)를 불태우기로 결심했다.
집체교육을 받는 일주일을 책 읽는데만 바쳤다.
그래서 삼분의 일쯤 보았다. 그리고 방위 말년휴가 일주일을 꼬박 또 그 책 읽는데 바쳐서, 또 삼분의 일 전진하였다. 그리고 그 녀석이 훈련을 마치고 오기 2~3일 전까지 또 그 책의 독서로 보냈다. 그래도 한 50페이지 남았다. 독서 완료까지 25% 미달이었다. 더 이상 못 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로 쓰여 있는 책 이건만, 그 책을 읽으려면 국어사전을 찾아서 독해를 해야 했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 요즘 우리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네! 고 3 때 보다도 더 열심히 하는 거 같아..."
거의 삼 주간을 취침 시간을 제외하고는 나에게 하나도 쓸데없는 그 책과 씨름하는 꼴이었다.
그리고 그 원수 같은 책을 완독을 다 못한 채, 드디어 독후감 집필에 들어갔다.
며칠밤을 세우면서...
원고지 100매를 채우지는 못했고, 80매가 좀 넘도록 썼던 것으로 기억된다.
친구가 훈련을 마치고 학교에 복귀하던 날 아침... 그 녀석 등교시간에 친구의 집 앞에서 결과물을 전달했다. 녀석이 표지를 뜯어내고, 자신이 다시 써서 원고지 뭉치 앞에 다시 철을 했다.
그래야 자신이 쓴 거 같다나, 뭐라나...
사실 나의 필체가 워낙 악필이어서 친구가 보기에도 민망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의 체면을 살려주느라 나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 악필은 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터다.
직장 생활할 때도 갖고 다니던 노트에 기록했던 메모들이, 나중에 내가 들쳐봐도 뭔 글씨인지 나도 몰라 회의 시간에 엄한 소리를 해대고 했으니...
그로부터 일주일 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 그 리포트 에이뿔 받았다. 내가 밥 살게! "
비록 순댓국에 소주 한잔 얻어먹었지만, 내 평생 그렇게 기억에 남는 접대는 없었을 거다.
나는 지금에야 고백한다.
" 친구야! 그 리포트 쓰는데...
일주일밖에 안 걸렸다고 너에게 얘기한 것 다 뻥이다.
사실 네 숙제 대신하느라 한 십 년은 나이 먹어 버린 것 같아...그 리포트에 나의 뇌 일부분과 영혼을 갈아 넣어서 쓴 거야. 사실, 순댓국 한 그릇으로 때운 거 엄청 후회했어! 삼겹살이라도 얻어먹고 소진한 기력을 회복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때의 하드 트레이닝 덕분에 지금 일기 수준의 글 이나마, 뻔뻔하게 쓸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그 친구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