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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원 Dec 04. 2023

세상은 요지경(瑤池鏡)

내가 몰고 다니는 고속버스의 괴산 노선은 아래와 같다.


괴산 <-> 증평 <-> 강남(센트럴시티 터미널)

편도 운행에 걸리는 거리는 약 150km 정도 되며, 두 시간을 소요한다.

좀더 자세하게 노선을 말씀드리자면...

괴산에서 증평까지는 국도로, 증평 톨게이트를 통과 후에는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 대소 분기점까지 가고, 다시 평택.제천간 고속도로를 이용해 안성 분기점까지, 그리고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 강남구 반포에 있는 세트럴시티 터미널까지 한 번도 쉼 없이 달려간다.

이 노선을 하루에 이렇게 두 번 왕복하는 것이 괴산 버스 기사의 평상시 임무다. 버스 기사들은 이렇게 편도로 네 번 왕복하는 노선을 네 가닥 노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다섯 가닥 노선이 배차되어 괴산 촌놈이 서울 서초동에서 외박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외박을 하든 말든, 사랑하는 나의 아내는 별다른 신경도 안 쓰지만...


경기고속 고속버스는 강남 터미널에서 증평까지는 시외고속버스로 인허가가 나 있다.

그러므로 고속도로로 주행(운행거리 100km 이상 + 60% 이상)하여야 하고, 출발지(기점), 도착지(종점)만 정차를 해야 하며, 중간 정차가 불가하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증평부터 괴산까지는 고속도로가 없으므로 일반 국도로 다닌다. 그 때문에 시외 직행버스로 인허가가 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괴산 터미널로 들어오기 전 괴산읍 입구에 있는 문무 아파트(학생중앙군사학교 영외주택단지) 앞 정류장에서 하차를 원하는 승객이 있으면, 가끔 정차하기도 한다.


강남으로 출발하기 위해 괴산 터미널 홈에 차를 댔다. 출입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가 아직 반밖에 열리지 않은, 작동 중인 문에 머리를 디밀고 기사에게 질문한다.

머리가 허연 아저씨다.


"내가 수원에 가야 허는데, 중간에 수원에 안 들리나요?"

"네! 수원에는 가지 않습니다. 그냥 고속도로로 서울까지 갑니다."

"그러면 고속도로 달리시다가 수원 근처에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네! 안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저씨 질문에 내가 말려든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지 마시고 고속도로에 있는 수원정류장에..."

참 집요한 분이다.


'아! 이 분이 고속도로에 있는 버스 환승장을 얘기하는 모양이네!'


"이 버스는 중간에 정차하여 승객을 내려 드리면 버스 인.허가가 취소됩니다. 그래서 불가능합니다. 버스 터미널에 내리셔서 수원 가는 버스를 타시거나 전철을 이용하십시오"

이해하시기 편하게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로부터 이 주 정도 지났을까...

평상시와 같이 서울로 가기 위해 괴산 터미널 홈에 차를 댔다.

"이 버스 수원에는 안 서나요?"

'가만, 이 질문 언젠가 들었었는데... 시골버스만 데자뷔가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고속버스도 그런가...'


사실 내가 안면 인식장애가 좀 있는 편이어서 사람 얼굴 기억을 잘 못 한다. 그러나 그 사람과의 대화내용은 수 십 년 전 것도 기억해내어 싫은 소리를 하는 바람에 당사자와 관계가 어색해진 일도 있다.

그래서 아내가 항상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여보! 쓸데없는 기억은 좀 잊어버려요! 괜히 분란(紛亂) 만들지 마시고..."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그 사람이 분명하다.

'그래! 오늘은 절대로 말려들지 말아야지! 으흐흐...'


"수원에 서지는 않는데, 수원 근처를 지나갑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이 버스가 수원 분기점을 지나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그러면 나 좀 수원에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 양반 그냥 상습범이다.

기사가 들어주지 못할 부탁을 버스 기사에게 하고, 그 반응을 재미삼는 것이 취미인 게 분명하다.

얼굴에 살짝 묻어나는 비웃음이 그걸 증명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인간성격의 다양성(多樣性)을 몸소 증명하며, MBTI(Myers Briggs Type Indicator)검사를 하는 이유를 일깨워주는 사람이다.

"안 될게 뭐 있겠습니까? 이 버스가 시속 100km로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수원 근처를 지날 때 제가 50km로 속도를 반으로 줄여 드릴 테니 적당한 순간에 뛰어내리십시오! 그러나 선생님 목숨은 제가 책임 못 집니다."

"그냥 해 본 말인데, 기사님이 너무하시네!"

"저도 그냥 해 본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그런 얘기 기사에게 하지 마세요! 아셨죠?"


먼저 타고왔던 승객이 뇌물로 시원한 콜라캔을 기사에게 주고 내렸었다.

꾸울꺽...어흐...

나도 모르게 배속으로 부터의 울림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아~ 시원하다!"

세상은 요지경(瑤池鏡)속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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