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평 Oct 20. 2023

핫초코와 담요 한 장

11.01


있잖아, 우리 떠나자
벌써 겨울이야
입김이 나오고, 손이랑 귀가 시려운 겨울-

우리 떠나자, 핫초코 한 잔과 담요 한 장을 들고
아린 손을 녹이고 언 다리를 감싸줄
핫초코와 따뜻한 담요를 들고 우리가
진심으로 떠날 수 있을 때
진심전력을 다해 떠나자

맘을 시리게 하는 모든 걸 놓고 떠나자
손도 시리고 귀도 시린데 맘까지 시리면
어떻게 살으니

하이얀 눈이 뽀얗게 덮인 산을 건너자
단단하게 얼어붙은 강 아래 잉어 위를 건너자
멈추지 않고 철썩이는 바다를 건너자
희게 질려 으슬거리는 백사장을 밟고 떠나자

우리 뒤를 붙잡는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떠나자
우리 발목을 에워싸는 시린 것들를 모조리 벗고
그저 내가 너를 위해 탄 핫초코 한 잔과
네가 나를 위해 짠 담요 한 장을 손에 쥐고
떠나버리자

가끔은 어둔 동굴 안에서 추위를 견디고
손발이 얼어버릴 지라도
얼어버린 손이 식은 잔으로 데워지지 않을 때마저도
우리는 떠나버리자

언 손을, 언 발을 이끌고
동굴에서 모닥불을 피자
작은 일회용 기름 라이터의 휠을 돌려
모닥불을 피자
그 사이로 핫초코를 끓이고
그 사이로 담요를 덥고
외투를 조금 더 꼭꼭 잠가버리자

아- 겨울이다
핫초코와 담요 한 장이라면 우리는
어디는 떠날 수 있는 그 곳

매거진의 이전글 화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