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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고3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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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평 Jun 04. 2023

패배주의자가 자라나는 학교

나는 패배주의자가 되어버렸다는 걸 믿지 못해서

특목고에 입학한 학생들이 흔히 하는 착각은 내가 남들보다 뛰어날 지도 모른다는 거다. 제일 큰 착각이자, 오만이고... 아마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첫걸음이다. 세상은 넓고, 내가 살던 우물은 너무 좁다는 것을 모르는 아기 개구리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특목고다.


특목고의 입학 조건은 올 A도, 성실함도, 우수한 학업 능력도 아니다. 첫째는 집안의 도움, 둘째는 탈선의 정도, 셋째는 개인의 능력이다. 대부분의 학부모는 교육업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본인의 자녀에 대한 기묘한 기대감에 젖어 있다. 분명 본인과 상대의 결합으로 빚어진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대감 속에서 잘 자란 아이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어느 정도 우수한 성적을 받고 졸업한다.


그리고 기묘한 기대감을 스스로 품은 아이는 벽에 부딪힌다. 쟤는 부모님이 둘 다 카이스트 나왔대, 쟤는 외갓집이 진짜 부자라던데, 쟤는 하루 종일 자기만 하는데 공부 잘해... 아무래도 그런 편이다. 집중력도 학업 능력도 노력은 한계가 있다. 10시간을 자고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아이가 있고, 평균적으로 3시간에 한 번씩 쉬어준다면 8시간을 꼼짝없이 앉아있을 수 있는 아이가 있다.


부모로부터 기인한 기묘한 기대감은 어느새 본인의 뇌리에 뿌리를 내려 스스로에 대한 강박과 희망고문을 일궈낸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곳에서 절망한다. 나의 기묘한 기대감은, 내 책상 위에 붙어있는 S대 깃발은, 내가 7살에 가졌던 꿈은 허상이고 허황된 것이었을 뿐이라는 현실로 변모한다. 다른 친구가 S대 준비반에서 면접 준비를 할 때, 나는 7살의 꿈을 접을 준비를 한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한 감정을 자아낸다. 일종의 패배의식. 고등학교 3년 동안 내신 시험을 총 12번 치르고, 모의고사는 적어도 10번가량 치른다. 36개월 동안 22번의 평가에서 지고, 또 지고, 또 진다면... 자연스레 패배주의에 찌든 반도의 학생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극복할 수도 있다. 성적을 올릴 수도 있다. 생각보다 모의고사에서 1등급을 받기 어려운 것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특목고에서 본인이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의 타인을 목격한 이상, 목격자가 된 아이는 본인이 엑스트라일 뿐이라는 감정을 지울 수 없다. 아- 우리는 왜 싸워야만 하는가...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고, 내가 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도 잘 아는데... 고3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고 더 이상 내 책상 위 S대 깃발은 동기 부여의 기능조차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고, 그것을 인정하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내가 이 작은 사회에서 이미 져버렸고, 앞으로도 뒤쳐진 출발선에서 아등바등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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