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의 깨달음

두노인

by Firefly

전직 의료기기 회사 사장이자 현재 마을 활동가로 활약하시는 성기돈 님과, 그의 단짝이자 두 딸을 홀로 키워낸 불교 신자 박현선 님의 우정을 담아 톨스토이의 '두 노인'을 최종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와 가치관을 가졌지만, 결국 '이웃 사랑'이라는 하나의 길에서 만나는 두 분의 이야기를 확인해 보세요.


65세의 깨달음 : 당진 성지 길의 두 노인


1. 정밀한 설계도와 낡은 염주

평생 의료기기 회사를 경영하며 오차 없는 삶을 살았던 성기돈. 은퇴 후 고향 당진에서 폐가를 정비하는 마을 활동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의 가방 안에는 여전히 치밀한 순례 일정표가 들어 있었다. 이번 목적지는 솔뫼에서 해미로 이어지는 천주교 성지 순례길이었다.

그의 곁에는 평생지기 박현선이 있었다. 일찍이 아내를 여의고 홀로 두 딸을 번듯하게 키워낸 홀아비이자, 손목에 낡은 염주를 감고 다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기돈아, 천주교 성지 가는 길에 이 불제자가 끼어도 되겠나?"

박현선이 허허 웃으며 짐을 챙겼다. 성기돈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자네처럼 허허실실해서는 해미성지 낙조 미사 시간에 못 맞추네. 내 일정표대로 딱딱 움직여야 하니 딴청 피우지 말게."

2. 신리성지 앞, 자비와 사랑의 갈림길

솔뫼성지를 지나 신리성지로 향하는 들판은 뜨거웠다. 성기돈은 GPS 앱을 확인하며 보폭을 늦추지 않았다. 그에게 이번 순례는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완벽한 공정과 같았다.

하지만 신리성지 근처 마을 어귀, 폭우로 반쯤 무너진 폐가 앞에서 박현선의 발길이 멈췄다. 그곳엔 병든 노모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사내의 절규가 있었다.

"기돈아! 이 집 담벼락이 곧 무너지겠어. 저 할머니 좀 보게. 일단 사람부터 살려야지."

성기돈은 시계를 보았다. "현선아, 우린 활동가이기 전에 지금 순례자야. 내일 사람을 보내주기로 하고 어서 가세. 신령한 성지에 닿는 게 우선이지."

그러나 박현선은 이미 작업복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부처님 마음이나 예수님 마음이나 다 똑같지 않겠나. 내 눈앞에 지옥이 있는데 극락(성지)에 가서 무얼 하겠나. 자네 먼저 가게. 난 여기서 이 집 기둥이라도 세워야겠네."

3. 화려한 제단 위의 공허함

성기돈은 홀로 신리성지에 도착했다. 장엄한 성당과 기념관은 아름다웠지만, 제단 앞에 무릎을 꿇은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 무거웠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도착했는데, 왜 평화롭지 않은가?'

그날 밤 꿈속에서 성기돈은 환상을 보았다. 화려한 성당의 십자가 아래, 염주를 쥔 박현선이 무너진 집 마당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때 성당 전체가 말할 수 없이 따뜻한 빛으로 가득 찼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친구가 지금 나를 대접하고 있구나."

4. 65세, 비로소 만난 진짜 성지

다음 날 새벽, 성기돈은 해미성지로 향하는 길을 포기하고 다시 신리성지 앞 폐가로 달려갔다. 그곳엔 밤새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무너진 담을 보수한 박현선이 땀을 닦고 있었다.

전직 의료기기 사장이자 현재 마을 활동가인 성기돈의 눈에, 두 딸을 홀로 키워낸 친구의 거친 손마디는 그 어떤 성물보다 거룩해 보였다.

"기돈아? 해미까지 안 가고 왜 돌아왔나?"

"현선아, 자네가 있는 곳이 진짜 성지인 줄도 모르고 내가 멀리만 찾아다녔네. 종교가 무에 중요하고 형식이 무에 중요하겠나. 마을 활동가라는 놈이 정작 내 곁의 이웃은 못 봤어."

성기돈은 배낭에서 망치를 꺼내 들었다. "나도 거듭세. 진짜 순례는 여기서부터야."

65세의 성기돈은 그날 해미성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친구의 땀방울과 무너진 폐가의 마당에서 그토록 찾던 신의 얼굴을 발견했다. 평생 다뤄온 정밀한 기계보다 더 따뜻한 '사람의 체온'을 배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순례였다.

자료 정리 및 설정 반영


* 성기돈: 전직 의료기기 회사 사장 출신의 꼼꼼함과 원칙을 가진 마을 활동가. 형식적 순례에서 실천적 사랑으로 변화하는 인물.

* 박현선: 두 딸을 키워낸 강인함과 불교적 자비심을 가진 인물. 종교를 초월한 이웃 사랑(폐가 정비)을 몸소 실천하는 동행자.

* 배경: 당진의 솔뫼, 신리, 해미성지 등 내포 문화권의 실제 지명과 마을 활동(폐가 정비)을 결합.

* 주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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