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관여하지 않은 나의 진로 (2)

by 아비드야

“아니, 할머니! 멀쩡한 물건을 가지고 가시면 어떡해요.”

“기사 양반, 미안해. 난 버리려고 내놓은 박스인 줄 알고.”

“저번에도 택배 없어졌다고 난리가 나서 제가 물어줬다고요. 그때도 할머니가 가져가신 거 아니에요?”

“아니야, 이제까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어. 정말이야.”

“왜 확인도 안 하시고 남의 물건 가져가시는 거예요? 들어보면 알잖아요.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비어 있는지.”

“미안해. 내가 요새 정신이 없어서…….”

밖이 시끌시끌하다. 우리 집 바로 앞이다. 반지하 집이니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 위라고 해야 하나. 창문으로 사람 얼굴은 볼 수 없고 발과 다리만 보인다.

상만이 형과 헌구가 창밖으로 올려다보더니 재빨리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할머니는 두 사람을 보고 발을 동동 굴리며 반가워했다. 그리고 둘에게 택배기사에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며 억울해했다. 상만이 형은 헌구를 시켜 폐지로 가득 찬 장바구니 카트를 우리 집에 갖다 놓으라 하고 택배기사를 얼렀다. 다행히 대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택배기사는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는 할머니의 다짐을 받고서 순순히 물러났다. 할머니는 자신의 억울함을 재차 토로하며 형과 함께 우리 집으로 내려왔다.


“여기 스님 집이여? 허, 처자도 있네. 어, 것도 두 명이나 있네?”

할머니 눈이 어두워서 그런가, 내 머리카락이 길고 몸이 홀쭉해서 그런가, 나까지 여자로 보이나 보다.

“할매, 내가 이거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돈도 얼마 안 되는데 몸만 축난다니까.”

“나 같은 늙은이 어디 써 줄 데도 없고, 이런 거라도 해야지. 헌구 할머니처럼 어디 청소할 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나라에서 연금 주잖아요. 유공이도 돈 벌어오고.”

“연금 그거 얼마나 된다고. 아 참, 안 그래도 스님 찾아갔었는데, 갈 때마다 절에 안 계시더라고. 여기서 노느라 바빠서 그런 거였구만. 승복도 안 입고 말이야.”

할머니는 다시 한번 나와 담희 누나를 의뭉스러운 눈으로 훑어봤다.

“놀기는 무슨. 다 일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알았어. 그건 그렇다 치고, 스님, 우리 손자 놈 말이야.”

“유공이 그놈이 또 사고 쳤어요?”

“그건 아니야. 스님이 혼내 준 뒤부터는 착실하게 잘살고 있어. 나쁜 친구도 안 사귀고 술도 거의 안 먹어.”

“그런데 왜요?”

“이놈이 나쁜 짓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요새 좀 이상해…….”


유공이라는 젊은이는 할머니 손자다. 공부엔 흥미가 없어 고등학교 졸업 후 게임이나 하며 빈둥거리다 용케 취직을 했는데, 일하게 된 곳이 하필 다단계 회사였다. 평소 자신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유공은 인생의 의미와 성공을 속삭이는 사탕발림에 쉽게 속아 넘어갔다. 그는 입사하자마자 곧바로 ‘네트워크 마케팅’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유공의 얘기를 듣자마자 욕을 하거나 전화를 끊었고 그나마 연락이 돼 회사에 데리고 간 친구들과도 곧 연이 끊기게 되었다. 자신의 밝은 미래를 위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리라 믿었던 친구들로부터 절교를 당하자, 유공은 방향을 바꿔 이번엔 친척들에게 연락을 넣었다. 평소 연락이나 만남이 드물었던 친척들은 당연히 유공의 얘기에 화를 냈고 더 나아가 할머니에게 손자가 해서는 안 될 나쁜 짓을 하고 있다며 엄중하게 경고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할머니는 동네의 고민 해결소로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있던 모하사를 찾았다. 상만이 형은 당시 절의 신도도 아니었던 할머니를 위해 기꺼이 나서 주었다.


며칠간의 잠복과 미행 끝에 유공의 행방을 알아낸 뒤, 형은 다단계 직원들이 합숙하는 빌라로 쳐들어가 그곳을 초토화하고, 철없는 손자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튿날, 기세를 몰아 다단계 본사로의 기습을 감행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직이 정비되지 않고 어수선했던 회사는 사천왕의 용력을 내뿜는 형에 의해 아수라장이 됐다. 형은 승급을 위해 유공이 샀던 물건을 모조리 환불시켰고 숙소 생활을 하며 빚졌던 집세와 식비, 교통비 등 일체의 생활비용까지 받아냈다. 유공은 그 후 형의 소개로 타일공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형은 당장은 힘들고 벌이가 시원찮아도 성실하게 기술을 배우고 익히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거라며 유공을 공사 현장으로 보냈다. 일당백을 능가하는 괴력난신의 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겪은지라 유공은 감히 상만이 형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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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유공은 다행히 딴 길로 새지 않고 열심히 일해 제법 큰돈을 할머니에게 안겨 주고서 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제대 후 차일피일 작업 현장으로의 복귀를 미루더니 슬그머니 다른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피곤하다며 잘 감지도 않는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작업할 때 편하다며 내내 입고 다니던 등산복이나 추리닝 대신 유행하는 옷을 구입했다. 예전에는 재촉하지 않아도 내밀던 생활비를 더 이상 주지 않았고, 오히려 할머니에게 용돈을 받으며 다녔다. 할머니에게는 아직 일이 자리가 잡히지 않아 수입이 적다며, 조금만 참으면 전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안심시켰다. 출근 시간도 일정치 않았다. 한밤중에 집을 나갔다가 다음 날 저녁에 돌아오기도 하고, 늦은 아침에 나갔다가 점심쯤에 바로 귀가하기도 했다. 다른 이웃들로부터 유공이 이상한 사람과 어울린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할머니는 더는 안 되겠다 판단하고 다시 상만이 형을 찾게 된 것이었다.

상만이 형은 할머니 이야기를 다 듣고 주먹으로 우두둑 소리를 냈다.

“알았어요. 내가 그놈 만나볼게요.”

“스님, 이번엔 무지막지하게 휘젓지 마. 그때 스님이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뒤에서 막 수군대더라고. 내가 스님 그런 사람 아니라고, 우리 도와준 거라 말했는데도 한동안 소문이 안 좋았어.”

“할매, 본인 걱정이나 해요. 돈도 안 되는 폐지 수집은 당장 때려 치고. 맨날 허리 아프다고 골골대면서 종이는 왜 주우러 다니는 거야.”

할머니는 한숨을 쉬고 담희 누나가 내놓은 차에 입을 갔다 댔다. 어라, 우리 집에 차가 있었나? 그러고 보니 싱크대 위 티백 차 옆에 커피믹스도 보인다. 나도 모르는 사이 살림이 늘어나고 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