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나사가 풀어진 것 같다. 더 이상 조여질 수 없을 만큼 꽉 조여 저세상에 가긴 전에는 끄떡없을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느슨해졌나 보다. 이대로는 애를 써서 겨우 굳힌 결심이 흐지부지 물거품이 되겠지. 결심을 실천하기는커녕 이곳에 남기 위해 주먹 불끈 쥐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 할 판이다. 아직 미련이나 아쉬움 따위가 남았나. 분명 그럴 리는 없을 텐데. 희망이나 긍정, 낙관과 같은 나부랭이는 절망이나 좌절, 체념에 짓밟혀 진작 사라졌을 텐데. 풀어진 나사를 어떻게 하면 다시 조일 수 있을까 고민해 본다. 내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한 일일지,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더 헐거워지진 않을지 가늠해 본다. 어쩌면 지금처럼 어영부영하다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의지를 갖고 노력한다고 잘 풀려온 인생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마냥 기다리다 보면 그 시간이 찾아오기는 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헛돌다 녹슬어 버리지나 않을까. 사는 게 참 마음대로 안 된다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사라지는 일마저 이렇게 힘드니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가 나를 부르며 문을 두드린다. 초인종이 있는데 굳이 저러는 이유가 궁금하다. 비몽사몽 자리에서 일어나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아저씨, 사무실 가야죠. 빨리 일어나요.”
헌구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참 빨리도 왔다. 학교 가는 날이나 이렇게 빠릿빠릿하게 행동할 것이지, 다들 늘어지는 주말 아침부터 쳐들어와서는 남의 단잠을 깨우다니.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요즘 몸이 달았다. 공 네트워크 크리에이터 중 최초로 세 자릿수 조회수를 달성하더니 창작 욕구가 마구 샘솟는 모양이다.
졸지에 1인 크리에이터가 되었다. 아니, 아직은 아니지. 영상을 촬영해 올린 게 없으니 지망생쯤 되려나. 순감이는 아무거나 괜찮으니 내키는 대로 찍어보라 하는데, 뭘 주제로 삼아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건 둘째 치고 영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욕도 없다. 여태껏 1인 미디어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그런 류의 영상을 시청해 본 적도 없는 내가 어떻게 창작자가 될 수 있겠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상만이 형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여기 집어넣은 걸까? 일단 둘러댄 이유란 게 순감이가 사기꾼인지 아닌지 감시하고 보고하라는 거였는데 진짜 그 때문인지는 의문이다. 사기의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고 수차례 이야기했지만, 형은 믿을 수 없다며 계속 지켜보라고 했다. 최소 육 개월은 같이 지내봐야 사람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다며 오히려 헌구나 유공이를 시켜 내가 사무실에 잘 나가는지 감시하고 있다.
순감이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판단은 나 혼자만의 견해는 아니다. 담희 누나나 헌구 또한 동의하는 바다. 처음 봤을 때 일어났던 거부감은 순전히 나의 편견이었다.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하고 사차원적인 면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긴 해도 누군가를 해코지할 만한 인물은 아니다. 엉뚱하다 못해 황당한 아이디어를 내서 우리를 어이없게 만드는 경우가 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금전적인 요구를 하거나 부당한 노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필요한 장비가 있다고 말하면 즉각 구비해주고 식사도 매끼 꼬박꼬박 챙겨준다. 사무실에 드나든 한 달여 동안 회식도 벌써 세 번이나 했다. 소속사의 모든 운영비를 본인 자비로 충당하며 크리에이터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해주려 노력한다. 솔직히 말하면 별 내세울 거 없는 나 같은 사람을 끌어들여 유튜버로 키우려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유공이가 귀띔해 주길 순감이가 이미 죽을 때까지 펑펑 쓰고도 남을 돈을 벌어둔 터라 소속사 운영은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전에 다단계 회사에서 일한 것도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한 일환이었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고 했다. 음, 그렇다면 다행이고 덜 미안하긴 한데, 유공이 녀석이 허풍이 있어서 백 프로 사실인지는 확신할 수는 없다.
순감이의 확실한 뒷바라지 덕분에 사무실 분위기는 더없이 좋다. 다들 자유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자기가 원하는 콘텐츠를 찍고 서로 도움을 준다. 다만 공 네트워크가 잘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다. 순감이가 툭 하면 언급하는 1인 미디어의 잠재성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바이나 우리가 그 바닥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긴가민가하다. 본인은 우리 각자가 특별하고 창의적인 포스를 지녔다며 성공을 장담하는데, 글쎄,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1호 크리에이터 유공이는 실시간으로 게임을 하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송을 하고 있다.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이미 하고 있는 레드오션이다. 나름 차별화를 둔다며 출시된 지 오래된 고전 게임이나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비주류 게임 가운데 즐길 만한 것을 골라 방송을 진행한다. 다만 현재까지는 반응이 거의 없다. 순감이나 헌구, 담희 누나, 내가 번갈아 가며 유공이 방송에 들어가는데 시청자가 대부분 다섯 명을 넘지 않는다. 내가 게임을 즐기지 않아 그런지 몰라도 방송이 대체로 심심하고 지루하다. 아무리 게임 채널이라지만 적당히 진행도 하고 상황에 따라 분위기도 띄워야 할 텐데 그런 모습이 전혀 없다. 누군가 질문을 해도 못 본 건지, 못 본 척하는 건지, 설명은 않고 죽어라 게임만 한다. 처음엔 말을 하지 않는 데에 어떤 의도가 있는 줄 알았는데 시청자가 늘고 여유도 생기면 소통도 할 거란다. 아니, 소통을 안 하려면 실시간 방송을 하는 의미가 없지 않나? 순감이는 크리에이터의 창의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별말 않고 내버려두는데, 이게 옳은 방향인지는 의문이다.
내가 2호 크리에이터로 영입되고 나서 채 오 분도 안 돼 3호 크리에이터가 된 담희 누나는 타로를 소재로 한 채널을 열었다. 평소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던 모습과는 달리 자신은 아직 제대로 리딩을 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면서 운세나 점을 보지는 않고, 타로의 역사나 유래, 카드 한 장 한 장에 담긴 의미와 상징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을 주로 올린다. 이쪽도 역시 비슷한 류의 영상이 많은 탓에 조회수가 잘 나오지 않는다. 순감이는 담희 누나가 얼굴을 보여주면서 방송하면 조회수가 많아지고 구독자도 쭉쭉 늘어날 거라 조언하는데, 누나가 얼굴 노출은 안 된다며 완강하게 거부했다. 일리가 있는 견해라 나도 권해봤으나 오직 타로에 대한 열정과 실력으로 승부를 보겠다며, 누나는 여전히 얼굴 노출을 꺼리고 있다.
그나마 4호 크리에이터인 헌구의 채널이 나은 편이다. 헌구는 호기심에 사무실에 놀러 왔다가 어지간한 사람에게는 발동되는 순감이의 직감에 의해 발탁되었다. 처음에는 먹성이 좋아 먹방을 하다가 헌구의 맑고 진중한 목소리에 주목한 담희 누나의 권유로 낭독하는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읽는 거리는 다양해 소설이나 수필, 동화를 읽기도 하고, 영화나 연극의 대본으로 어설픈 연기를 섞어 읽기도 한다. 꽤 공을 들여 십여 개의 영상을 올린 후 반응이 시원찮아 먹방 콘텐츠로 다시 돌아가려고 할 즈음, 갑자기 조회수가 올라가고 구독하는 이가 늘어났다. 화가 나거나 우울할 때 틀어놓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힐링이 된다며 호의적인 댓글도 많이 달렸다. 우리나라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들도 듣는 모양인지 외국 언어로 쓰인 댓글도 있다. 이런 콘텐츠를 좋아하고 즐기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에 신기함을 느끼면서, 새삼 세상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