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시간 속을 걷는다

by 맥키아



비는 대개 예고 없이 다가온다.
일기예보보다 먼저 몸이 먼저 알아챈다.
조금 눅눅해진 공기 어딘가 맥없이
흘러가는 바람의 방향. 그럴 땐...
아... 비가 오겠구나...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오르고 놀랍게도 그런 예감은 자주 맞는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을 유난히 좋아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빗소리는 사람의
말보다 더 깊은 위로가 된다. 손등에 떨어지는
찬 물방울이 아직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속삭인다. 사람과 사람
사이보다 비와 나 사이의 거리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바다 위에 비가 내릴 때... 세상은 숨을 고른다.
파도도 멈추고 하늘과 물이 하나의 색으로
스며든다. 어느 고요한 오후... 나는 그 바다 앞에
홀로 서 있었다. 빛도, 사람도 없던 풍경 속에서
눈을 감았는데 이상하게 더 많은 것이 보였다.

숲 속에서 만나는 비는 또 다른 표정이다.
도시의 비가 유리창과 우산을 두드리는 솔직한
말이라면 숲의 비는 나뭇잎을 타고 돌며 속삭이는 비유다.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마저 조심스럽고
그 사이에 바람이 스며들면 하나의 음악이 된다.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젖은 숲길, 깊어진 흙냄새, 비는 내 어깨보다
먼저 땅에 닿는다. 나는 그 비의 뒤를 따라 걷는다.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음악을 튼다.
Bill Evans, Chet Baker, 그리고 Debussy.
이런 음악은 빗소리와 경쟁하지 않는다.
서로를 감싸며, 조용한 화음을 만든다.
아마 ‘조화’란 말은 이런 순간에 쓰는 것일 테다.

작은 볼륨으로 흐르는 멜로디, 살짝 열린 창으로
들려오는 빗소리, 그 모든 소리가 섞여 하루가
하나의 음악이 되는 기분이다.

그리고 잔 하나...

위스키든, 와인이든 상관없다. 그건 알코올이
아니라 마음의 온도다. 서서히 스며드는
따뜻함이 내 안의 빈 공간을 조금씩 채워준다.
그렇게 하루는 조용히 완성된다.

비는 상처를 찌르지 않는다. 대신 그 가장자리를
조용히 적신다. 처음엔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온통 젖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

비는 그런 존재다. 말이 없고
다만 소리와 냄새로 다가오는 다정함.

비가 오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헤어진 사람,
끝내 말하지 못한 문장,
쓰지 못한 오래된 편지...

하지만 비는 재촉하지 않는다. 묻지 않고,
다그치지 않고 그저 곁에서 젖게 한다.

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스며드는 것이다. 언젠가는 꽃이 되어
피어나고 가끔은 노래로 남는다.

그게 내가 비를 사랑하는 이유다.

그래서 오늘도 이 조용한 하루를 조금 더
천천히, 비의 시간 속에서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