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무게를 품다
산방산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 제주사계엔
비가 내렸고 산은 짙은 구름 속에 숨었다.
평소엔 그 무뚝뚝한 바위들이 강한 인상을
주는데 그 모습이 사라지니 더 존재감이
컸다. 마치 내가 나를 잃어버렸던 어떤
시기의 느낌과 비슷했다.
살다 보면 그런 날들이 있다. 특별히
아픈 일도 없는데 무언가 마음속에서
꺼져버린 것 같은 날들...나는 그 시기를
‘산방산이 구름에 가려진 시간’이라
부르고 싶다.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상태.
느껴지되 손에 잡히지 않는 감정.
산방산은 어쩌면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가진 풍경일지도 모른다. 날씨에 따라
얼굴이 바뀌고 계절에 따라 감정이
변한다. 맑은 날엔 힘 있고 또렷하다.
흐린 날엔 침잠해 있다.
사람도 그렇다.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종종 화창한 날의 자신만을
기억하려 한다. 웃고, 일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날들. 하지만 흐린 날 혼자
울고 있는 자신도 나다. 그걸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가끔은 산처럼
말없이 버티는 연습도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변화나
성취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모습을
인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해가 다시 뜨면
산방산은 또다시 분명한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산은 감춰져 있어도 변하지 않는다.
나도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삶이란 가끔은 산이 되는 일이고
때로는 바다가 되는 일이라는 걸...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고 흘러가도
괜찮다. 단단함과 유연함 사이에서
우리는 비로소 좋은 사람이 되어간다.
사는 일도 그와 닮아 있다. 대단한
계획 없이 가끔 멈춰 서서 풍경을
받아들이는 것. 산이든 바다든
그 모두를 지나치는 것...
그 여정 끝에 언젠가 더 깊고 단단한
우리가 되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산방산은 오늘...
초록 옷으로 곱게 단장한 채 사계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 바람은 이른 오후의
햇살처럼 부드럽고 다정했으며
그 바람에 산은 고요히 웃고 있는 듯
보였다. 누군가는 말없이 그 풍경을
스쳐 지나가고 나는 그 아래를 걷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내 머리칼 사이로
콧노래가 조용히 새어나온다.
지금 이 순간~ 나만의 길~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이 나를
쓰다듬는 것 같아 잠시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