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상호부조
량강도 혜산시 외곽.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싼 깊은 계곡 지대 위, 장대처럼 솟구쳐 늘어선 침엽수림 사이, 회색 건물의 윗부분이 빼꼼히 튀어나와 보이기 시작했다. 최민영 회장이 가끔 휴양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별장에 다가가고 있었다. 위에서 보는 건물과, 건물이 자리 잡은 공간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오면서 일성도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보았던 것처럼. 나은 비 작가도 나름의 어떤 기대 어린 상상을 했었는지 탄식 어린 감탄을 내뱉으며. 놀란 눈으로 아래를 내려 보며 말했다.
"예상 밖인데 이거. 난 좀 화려한 걸 생각했는데. 이건 좀 다르네... 멋지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일성도 같은 느낌이었다. "작가님 기대와 많이 다른가요?"
"별장이라고 하길래 어느 정도 이미지는 그렸지만. 회장님 별장이라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건 너무 콘크리트 사원 느낌 아니니? 세련된 느낌이긴 해도... 심하게 시크하네"
듣고 보니 그렇다. '안도 다다오'의 설계라도 되는 걸까 - 이건 마치 회장님을 위한 개인 기도원 같은 느낌이었다. 휴식보단 면벽참선이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
드론 택시가 천천히 하강하면서 건물의 아랫부분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세련미가 있다. 은비 작가 말처럼, 그러나 자극적인 미래형 건축도 아닌... 뭐랄까 묵직한 21세기적 미감이 살아있다.
4개 층으로 블록을 가져다 붙인듯한 미니멀한 컨템퍼러리 건축 양식. 유난히 높은 사방의 통창들 아래로 흐르듯이 구불구불 조성된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그 정원을 위에서 내려보면. 그 초록 물결이 실내의 리빙에이리어에서부터 흘러나와서 결국 계곡의 물을 만나는 지점까지 이어진다. 초록의 거인이 언덕을 급히 달려 내려간 발자국처럼...
일성은 은비 작가와 함께 회장을 다시 인터뷰하기 위해 1박2일 일정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다시 한번 일정을 익혀두자' 그는 시계 왼쪽 버튼을 두드린다. 그러자 지체 없이 스마트 안경이 일성의 시야에 새 창을 띄운다. 깔끔하게 표로 정리된 이번 출장 일정이 눈앞에 펼쳐졌다.
첫날 일정은 간단한 인사, 그리고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는 '집 구경, 정원 구경'. 이후 회장과의 인터뷰를 겸한 ‘풀 코스 디너 ’였다. 준비된 질문은 회장의 초년에서부터 청년까지의 삶... 추가적으로 NCC의 탄생과 발전사까지 포함되었다. 둘째 날 오전은 인터뷰, 오후엔 촬영팀과 기록용 영상 제작, 이번 준비 과정에서 최대한 줄이고 줄인... 질문 양이었지만. 최 회장의 컨디션이나 인터뷰 스타일로 보아. 이틀이 아니라 2주일이라도 모자랄 것 같은 질문들이었다. "야 이거 돈 더 받아야겠다" 은비 작가는 일성이 보내준 스케줄을 보자마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 무거운 듯 총명하고 친절한 노신사는. 극단적으로 짧거나 긴대답 말고는 하지 않는다. 중간은 없다.
감탄만 나오던 집안 구경, 꽃이라곤 한 뿌리도 없이... 온통 초록의 이끼와 야생 희귀식물로 채워진 '마초 감성' 가득한 정원을 다 둘러보고 나서는, 방안 침대에 던지듯 몸을 뉘었다. 집 한 바퀴 도는데 하루에 쓸 체력을 다 써버렸다. 일성은 방으로 돌아와 시간을 체크했다. 다행히 저녁식사까지 1시간 정도는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녁식사 대화는 대체로 즐겁고 유쾌했다. 회장의 어린 시절, 일찍 돌아가신 친모에 대한 얘기, 아마도 실제로 뵈었다면... 상당한 카리스마가 느껴질 것 같은 어머니 얘기가 길게 이어졌고. 그 외엔 회장 자신은 즐거워하지도. 생각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 불만 많던 청년 시절에 대한 짧은 답변들이었다.
오히려 모두가 흥미로워 했던 이야기는 아래 계곡에서 당일 낚시로 잡아 올린 물고기로 만든 애피타이저, 회장이 직접 운영하는 농장에서 가져온 오리고기와 수제 숙성치즈에 대한 토론들이었다. 그런 소소한 대화에서 최 회장은 연륜이 느껴지는 넓은 지식과 멋진 위트를 보여주었다. 귀족이자 성공한 노장군의 모습을 연상되었다.
본격적인 인터뷰는 북쪽으로 창을 낸, 고풍스러운 서재로 옮기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2084년 초여름이었지 싶어. 청와대 회의실에서 남한 대통령과 북한 총비서, 그리고 남북한... 여러 명의 경제 정치 인사들이 미팅을 했어... 한 스무 명은 더 되고 서른 명은 안되었을 거야"
문장 사이사이 호흡이 늘어진다. 이건 긴 답변이다. 일성은 허리를 의자에 깊게 묻고. 일부러 챙겨온 스마트 안경의 촬영이 잘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깜박이는 붉은 점. 돌아간다. 녹화 중이다. 이번은 특별히 촬영이 허가된 인터뷰다. 이영상은 실시간으로 회사 클라우드에 업로드될 것이다.
"그 해는 남과 북이 ‘통일 과정 중에 정치적 전환기’를 맞이하던 첫해였다고 생각해. 그때까지 우리는 국가를 대표해서 움직이는 존재는 아니었지. 솔직히 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한반도에 계속 본사를 둘 것이냐로 고민했던 적이 있었거든. 상황이 빨리 변했어... 그땐 국가가 나서서 기업들을 앞에 세우려고 했지. 물자, 기술, 기획, 투자, 재경... 심지어 국방문제까지 모든 면에서.”
일성은 안경테를 다시 쓰다듬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누가 우리지 이 맥락에서?
최 회장은 천천히 말했다. 그의 말투는 전보다 명확하면서도 고요했고, 메시지가 겉돌지 않고 빠르게 전달되었다. 은비는 재빠르게 메모를 적었다. 그러면서 빠르게 질문했다. "북측에서 먼저 제안한 회의겠죠?"
"그건 나도 정확히 모르지만. 그렇게 보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당시라면, 통일 주도권은 북쪽에 있었다고 봐야 하니까..."
회장은 몸을 더 깊게 소파에 욱여넣으면서 허벅지의 대부분이 소파에 묻히도록 깊게 몸을 묻었다.
“그전에도 우리 집안은 남한 쪽에선 꽤 영향력 있었지만, 통일 준비과정에서 새로운 재편은 기업들에게는 기회이자, 또 동시에 도박이었지"
회장은 크게 숨을 내쉬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당시 북쪽에는 자원 무역업을 기반으로 급성장한 패밀리들이 있었지. 그 사람들하고 먼저 손을 잡고... 그리고 군부나 정치권과도 충분히 교섭해서 새로운 회사, NCC가 만들어진 거야. 국가와 기업이 같이 간다. 그게 명분이었고... 실상은.. 생존을 건 포지셔닝 체인지에 더 가까웠는데... 선택은 정해진 것이었지. 다 없어지는 것보다는 전부 다 변하는 게 나으니까...”
일성은 순간, 그의 눈빛에서 강한 자기 확신을 보았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계획한 사람처럼.
“NCC는 그때 빠르게 올라갔지. 에너지, 화학, 인프라 건설 분야라면... NCC를 대체할 수 있는 회사는 세계적으로도 별로 없을 거야. 그때 만들어진 남북 합작 기업들이 지금 고려 경제의 8할 이상을 담당한다고 보는 게 맞을 거라고 난 생각하거든, 이래저래 많이 변했지만...” 일성은 회장의 이야기에 빠져 예상치도 못하게 돌발 질문을 한다.
"LFP는 그때부터 시공하시고 관리하시게 된 건가요?" 일성은 순간 아차 싶었다. 은비 작가의 시선을 느꼈지만. 일단은 무시하고 짐짓 굶주린 열혈 작가인 양 시선을 회장에게 고정했다.
"아니야... 그 당시 남북 모두 유전자 기술은 어느 정도 있었을지 몰라도... 미국 쪽 회사들이... 워낙 독보적이어서 국내 기술은 주로 보조적인 부분이었고. 주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미국 걸 가져다 했지, 그건 한반도만 그랬던 건 아니야... 다른 쪽도 뭐... 비슷했지"
"아마도 2062년 이전... 40년대 50년대 혼란기가 변화의 원인이었겠네요" 은비 작가가 혼잣말처럼 질문했다.
"그렇지" 회장은 남북통일한 재앙 같았던 기후시대와 대전쟁 시대, 그리고 대 이주의 시대를 기업 입장에서 묘사했고. 이 대화는 한참이나 걸려서 마무리되었다. 예정된 시간을 많이 지나서...
일성은 예정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게스트룸으로 돌아와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밤, 두 시간쯤은 눈을 부친 건지. 잠이 깬 일성은 하루 종일 긴장한 몸을 위해서라도 샤워를 해야겠다 생각했다. 몸의 이것 저곳이 마치 아우성치는듯했다.
일성은 샤워를 마치고 잠깐 창가에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여기선 별이 참 많이 보이는구나 생각하던 참...
소리?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 멀지만 분명 사람들 소리였다. 말소리? 일성은 주섬주섬 바지를 입고, 헐렁한 옥스퍼드 셔츠를 걸쳐 입고는... 호기심을 따라 아래층으로 어슬렁 어슬렁 내려갔다. 소리 나는 쪽은 응접실과 이어진 테라스 쪽이었다. 활짝 열린 통창 너머, 잔디가 깔린 테라스에 사람들이 앉거나 서서 얘기 중이었다. 무슨 사교 파티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손에는 반짝거리는 술잔을 들고, 대화를 나누는 말쑥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일성은 호기심에 일단 내려는 와보았지만 도저히 다가갈 용기는 나지 않았는지. 뒤돌아 계단 쪽으로 걸어가려던 찰나. 마주 오던 두 남녀와 마주쳤다.
"엇 작가님 아니세요?" 처음 보는 남자인데도 얼어붙게 만드는 완벽한 얼굴이다. 그 상황에 말문이 막힌 일성은 그저 눈을 껌벅거리며 얼어붙어 버렸다. 그 남자는 먼저 자길 소개하며 손을 내민다. "저는 최시우라고 합니다" 일성은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순간 준비 자료 중에 있던 최 회장의 가계도가 떠올랐다. 최시우 '그래 손자였던가? 증손자였던가?' 아 안경을 깜박했군...
"네 ... 음... 저는... 나은비작가 어시스턴트로 함께 온 보조작가 이일성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여동생 최시정이라고 하고요" 시정은 가볍게 목 인사를 건네며 웃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일성이라고 합니다"
일성은 마치 혼나간 사람처럼... 홀리듯 그렇게 무리들 사이로 끌려 들어갔다. 그렇게 얼떨결에 파티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다, 서로의 이름을 교환하고, 가볍게 웃으며 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패션, 도시생활, 최근 유행하는 비영리 프로젝트까지… 어색하지 않게... 그들은 남매의 지인이거나 어릴 적부터 알던 소꿉친구 같은 사람들이었다.
"작가님은 원래 글 쓰는 걸 좋아하셨어요?" 최시정은 내 빈 잔을 새로 바꾸어 주며 질문했다.
"네 뭐... 소질이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 소질보단 취향이 궁금한 거였겠구나... 이 사람은... 그런데 난...
아! 이 사람들 레가시구나. 일성은 문득 자기가 다른 세상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긴 회장님의 별장. 그렇다면 이 파티의 호스트는... 그러면은... 그 패밀리... 이 게스트들도 그렇다면... 아마도?
일성은 이후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이들 무리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최시우. 시정 남매들의 친구처럼 보이지만. 묘한 이질감도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친구처럼 행동하면서도, 뭔가 철저하게 위계화된 분위기’랄까? 최시우의 얘기 하나하나에 긴장하거나 딱히 눈에 띄게 주목하지는 않아 보이면서도, 반응을 잊지 않는 대화 태도라든가. 시정의 장난스러운 터치나 농담에 반응은 잘하고 있지만. 그녀에게 먼저 나서서 농담을 건네지는 않는 친구들이었다. 그러면서도 분위기를 유쾌하게 유지해 내는 이 파티. 이런 게 귀족적인 걸까? 모두의 말투는 유려하고 부드러웠지만, ‘가족 내 서열’ 혹은 ‘선별된 공동체’처럼 정제된 무언가가 있었다. 일성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그 분위기를 기억해두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회장님이 예정 시간보다 늦게 서재로 내려오실 거라는 전갈을 뒤늦게 받았다. 은비 작가에게 알리려 방으로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서재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서재엔 벌써 꽃단장하고, 커피를 한 손에 든 은비 작가가 무언갈 뒤적이며 보고 있었다. '저 원피스 너무 화려한 거 아닌가?' 은비 작가의 과한 치장에 의아해하며, 일성이 물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작가님"
그녀는 고풍스러운 가죽 커버의 앨범을 보고 있었다. 오래된 가족사진들이 정리된 앨범이었고, 그중에는 20대의 최민영 회장으로 보이는 사진도 있었다.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 옆에는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귀여운 강아지가 보인다.
“우와, 강아지 진짜 똑똑하게 생겼다. 사람처럼 눈이 반짝여.” 은비는 웃으며 감탄했다.
일성은 말이 없었다. 눈으로만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귀 모양, 털의 패턴, 눈의 반짝임까지 거의 동일했다. 그가 아는 강아지, 루비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루비의 조상쯤 되려나?
"회장님이 좀 늦으실 거라 하십니다 "
은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사진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답했다. "회장님 어릴 때 약간 꽃미남이었네" 앨범을 뒤적이는데 또 한 번 루비가 보였다. 아래 발 쪽은 보이지 않았지만 루비가 맞다. 그런데 이번엔 최 회장이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중년의 최 회장과 루비...
'같은 강아지가 아닌가? 혹시 죽지 않는 강아지쯤 되는 거야?' 일성은 그렇게 꽤 오랫동안 은비 작가와 나란히 앉아 앨범을 뒤적였다. 문득 회장님이 너무 늦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제가 가서 어떻게 되는 건지 좀 알아보고 올까요?" 은비 작가는 그러라는 손짓을 보냈다.
일성은 몸을 일으켜 복도로 나가 사람을 찾았다. 아니면 안내 드로이드라도 하나 잡고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복도의 코너를 두 번쯤 지나친 뒤에 위층을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올라가 보려던 순간 그 위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일성은 순간 멈추고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소리는 분명 들리는데... 이건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한국어 사투리는 분명 아닌데'
그 둘은 조용히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어도, 독일어도 아니었다. 심지어 일성처럼 언어 코드를 고급과정까지 배운 사람에게도 어느 계통에도 속하지 않는 듯한 말소리였다.
일성은 숨을 죽이고 한참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대화를 멈추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일성을 발견한 그들이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최시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원산으로 처음으로 회장을 방문했을 때 만난 백발의 집사였다.
일성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회장님이 늦으시는 것 같아서 좀 어찌 된 건지 여쭤보려고요..." 백발의 집사가 대답한다 "곧 나오실 겁니다"
"이쪽은 이일성작가님 그리고 이쪽은 알도 할아버지예요... 아니! 알도 총괄 매니저님이십니다" 그녀가 번갈아 두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했다.
"지난번에 원산에서 한번 뵈었습니다. 기억하시죠 작가님?"
'알도' 이름은 처음 들었다. 일성은 "아네 그렇죠, 기억하다마다요,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그는 가슴이 조금 떨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최시정도 포함된 한 가족만의 장소... 그런데 왜... 누구도 알 수 없는 언어를, 그것도 회장 손녀와 집사가 ‘비밀스럽게’ 대화하고 있었던 걸까? 마치 추리소설의 한 장면 같은 일 아닌가? 일성은 복잡한 마음으로 그 둘을 따라 서재로 돌아간다.
회장은 얼마 되지 않아 서재로 들어왔다. "아침식사는 잘 드셨나요?" 대답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소파에 앉으며 이어나갔다. "어제는 역사 수업 같은 인터뷰였는데요. 오늘도 또 옛날 얘기를 듣고 싶으신 거죠? 바로 질문 주셔도 됩니다"
은비는 긍정의 제스처인지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오늘 컨디션이 좋아 보이시니까... 빠르게 달려 볼까요?"
"네 그러시죠" 회장의 허락이 떨어졌다.
"어제 남북 기업들과 패밀리들의 합병을 통해서 NCC가 탄생했다는 부분에서 시작할까 합니다. 그때 여러 기업이 함께한 연합에서... 초반부터 최 회장님 쪽에서 운영 전반을 책임 지시는 임무를 가져가신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나요?"
"그건 사우디에서 시작되는데..."
"사우디요?" 약간 의외라는 듯 은비가 되물었다.
"결국 남북통일정부는... 지금 LFP라 부르는 이 시스템에서 NCC가 기업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확실히 구상하고 있었어. 그래서 우리 집안이 앞에 선 거지"
"LFP와 사우디라, 쉽게 연결되는 관계가 아닌데요?" 은비가 물었지만. 일성도 같은 의문이 들었다.
"그래 사우디, 보통은 우리가 요즘 흔히 말하는 코드젠이 미국 바이오 벤처 쪽에서 그 기원인 걸로 생각한다는 건 나도 잘 아는데. 사실은 그전에 중동 국가들이 해온 걸 무시할 수가 없어. 물론 지금 하고는 좀 다른 형태였고. 코드젠이니 하는 명칭도 없었지만. 전통적인 임신과 출산이 아닌, 인간의 기술만으로 인간을 탄생하게 한다는 시도는 중동 왕정국가들이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암암리에 시도하고 있었거든. 특히 사우디 왕가는 우리 집안과 몇십 년 이상 관계가 있던 사람들이고,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소스 중에 우리 쪽이 있었다'라는 쪽이 더 정확하려나..."
회장은 약간 머뭇거리는듯하였으나. 계속 ㅇ캐기를 이어 나갔다.
"NCC는 그때부터 이미 그쪽에 기술도 좀 제공하고, 공사도 좀 하고, 투자까지도 좀 진행이 되던 상황이었지"
일성에겐 이 부분이 이상하게 들렸다. '또 시점과 주체가 흔들린다. NCC가 만들어지기 몇십 년 전 얘기인데...' 그러나 이의를 제기할 정돈 아니지. 잊지 마라 그는 100세 노인이다.
"그리고 미국 쪽에서 기술을 가져와야 하는 문제도 있었고... 미국 애들이 북한 쪽 애들을 그때까지도 잘 믿지를 못했어. 미국정부도 그랬고, 그래서 밖으로는 우리 집 사람들이 카운터파트가 되는 게 안전했지. 그래도 NCC 초기를 생각해 보면, 내부 세력 다툼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하지. 아니지 치열했지... 상당히..."
"결국은 지금처럼 NCC가 최 회장님 아래에서 운영되는 게 우연은 아니었다는 말씀이시네요" 은비의 질문이 좀 도발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우연히 어딨나. 이 세상에... 난 그런 거 안 믿지. 다 연결된 거야. 43년이었지 기후시대가 시작된 게... 그리고 대전쟁 시대. 50년대의 대 이주 시대. 그걸 다 지나 서면서... 결국 우리는 스스로 노력을 통해서... 지금 이 세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게 유지해왔다고 생각해. 그걸 우연에 맡겼다면... 아마 우린 다 없어지지 않았을까?"
잠시 침묵이 흐른다. 은비 작가가 먼저 침묵을 깨고 질문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당시의 일들을 글로 읽다 보면. 너무 많은 것이 동시에 급격히 변하던 시기 같습니다. 역사이니 당시 그랬다는 걸 머리로는 알겠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 하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지 않아요. 이 인터뷰의 주제 중 하나일 수 있는 질문입니다만. 어떻게 그런 변화가 한 번에. 그것도 세계적으로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회장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고개를 들어 창밖을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창가에서 북쪽 산허리를 올려다보며. 말을 꺼냈다.
"은비 작가 상호부조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나?"
"글쎄요" 은비 작가는 고개를 가로 젖는다.
"우린 당시에 상호부조한 거야. 그 단어는 1800년대 후반. 러시아 지리학자이면서 왕가와 연결된 귀족이었고. 사상적으로 아나키스트라고 분류되는 사람이 쓴 책 제목이기도 하지... 상호부조라... 한마디로 하면 그건 서로 돕는다는 뜻이야 말 그대로..."
회장은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수십 마리의 원숭이들로 이뤄진 무리를 생각해 보자고. 그들은 무리를 이루어 천적에 대항하고. 먹이를 찾아 이동하면서 살 거야. 그 안에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세력 싸움과 위계질서. 그리고... 암묵적 전통과 치열한 삶과의 사투가 있거든. 그런데 말이야 무리에 어떤 이유로 환자가 발생하거나 부상당하는 일이 생기면... 리더는 이동을 멈추고, 무리 전체는 아픈 친구를 함께 보살핀다고 해. 멈춘다는 건 무리 전체가 천적으로부터의 리스크를 더 감수한다는 뜻이야. 또한 먹이 채집 양이 줄 수 있어서 모두가 좀 더 배고파질 수 있지. 그러나. 환자를 먼저 보살피고 나아지길 기다리지... 좀 그림이 그려지나?"
"위기가 조직을 단단하게 한다? 아니면 이기심을 내려놓고 협력하게 한다? 그런 의미인가요?" 은비가 혼잣말처럼 읍조리며 질문아닌 질문을 던진다.
"비슷해, 하지만 단어로는 설명하기 힘든데. 원숭이 얘길 더 해볼까?" 은비 작가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상체를 곧추세움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자연에선 대게 이런 식이지... 원숭이들은 포식자나 위험한 상황을 발견했을 때 다른 친구들에게 경고 신호를 보내지. 그리고 자신이 얻은 먹이를 다른 무리 구성원들과 자발적으로 공유하기도 하거든, 특히 어린 원숭이나 아프거나 약한 원숭이에게 더욱... 또 어미 원숭이 외에도 다른 무리 구성원들이 자기 새끼가 아닌 새끼 원숭이를 돌보는 행동을 해. 젖을 먹이거나, 업어주거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사는 법을 가르쳐 주지. 원숭이들이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걸 많이 봤을 거야 기생충을 제거하고 위생 상태를 개선하는 일종의 의료 행위지. 서로 서로 매일 해준다고... 아주 즐거워하면서 말이야. 또 뭐가 있을까... 원숭이 무리 내에서는 싸움이 자주 나는데, 다른 녀석들이 종종 중재자 역할을 하지. 갈등을 해결하고 무리의 안정성을 유지하는데 거침없이 용기를 내는 거야. 혹시 창피당하거나 그 갈등이 자신에게 옮겨 올 것을 걱정하는 법이 없지... 이런 본능을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라 이름 지은 거지"
회장은 잠시 말을 끊더니 물었다 "아 질문이 뭐였지?"
"2060년대 그렇게 급격한 정치. 경제적 변화를 이끈 에너지는 무엇이었나?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은비 작가 다시 확인해 준다.
"아 그래 ... 그러니까... 자연히 그렇게 되었어. 도와야 생존할 수 있다. 없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 인류는 이동을 멈추고. 상처를 치유하고 다친 자들을 기다려준다... 상호부조"
이후 인터뷰가 꽤 더 진행되었지만. 일성은 더 이상 대화가 귀에 잘 들어 오지 않았다. 원숭이 무리, LFP, 기후재난, 전쟁, 남북통일, 상호부조... 일성의 머릿속 안에서. 저 강렬한 단어들이 구름처럼 떠다니는 기분이다. 모든 코드젠들은 LFP라는 공공의 시설에서 태어나 보호받고 교육받는다. 사회는 코드젠을 기른다. 가르친다. 자원을 배분해 준다. 원숭이 무리처럼?... 복잡한 기분이다. 인류 문명의 변화를 저렇게 비유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