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오후 한 달 간격으로 찾는 미용실에 들렀다. 단골 미용사가 반갑게 맞이하며 자리를 안내한다. 자리에 앉자, 목에 천을 두르고 몇 개의 예비 작업이 있고 나서 이내 가위질이 시작된다. 빗을 쥔 왼손과 가위를 쥔 오른손의 손놀림이 능란하다. 이 경이로운 손놀림은 의식의 지배와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듯하다. 정교하게 잘려 나가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글감이 떠올라 미용사에게 물었다.
“가위질하고 빗질하는 것을 의식하세요?”
“아뇨, 의식 안 해요.”
“처음엔 의식하지 않았나요?”
“했죠. 가위와 빗을 어떻게 쥐어야 하고 어떻게 손을 움직여야 하는지 일일이 의식하면서 해야 했어요.”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두려웠어요. 나도 저들처럼 능숙하게 할 수 있을까? 진전이 없으면 어쩌지? 다른 길을 택해야 하나? 같은 걸로요. 근데 왜요?”
“아, 글을 쓰려하는데 갑자기 ‘처음’이라는 글감이 떠올랐어요.”
어렸을 적 외할아버지에게 젓가락질을 배웠던 것을 기억한다. 잘못 익힌 젓가락질을 다시 배우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젓가락을 쥐는 것부터 일일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젓가락 끝에 힘이 전달되지 않으니, 음식을 제대로 집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툴게 젓가락질하던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누구든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처음을 지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처음에 우리의 육체는 자신이 구상한 관념을 나타내는 데에 협조적이지 않다. 이 고약한 육체의 투정은 넘어야 할 첫 번째 고비다. 이 대수롭지 않은 고비 앞에서도 우리는 공연한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되고자 하는 자기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이 고비를 넘을 수 있을지, 넘어서지 못하고 이대로 이도 저도 아닌 자기로 남게 되지나 않을지 하는 두려움과 불안 말이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의 육체는 점차 투정 부리기를 그치고 자신의 관념을 반영하기 시작한다. 어떤 새로운 묘수가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성실한 ‘습관’이 우리의 육체를 길들였을 뿐이다. 이제 우리의 육체는 스스로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묵묵히 자신(정신)의 관념을 구현하는 충실한 하인이 된다.
글을 쓰는 지극히 정신적인 일도 육체가 자기의 반영으로서 기능하는 것처럼 그러할 수 있을까?
나는 지속해서 글 쓰는 사람으로 있을 수 있을까? 처음인 지금은 이 자그마한 동산을 넘는 것조차 힘겹다. 글쓰기에 적응하려는 나의 육체는 처음 젓가락질을 익힐 때나, 미용사가 처음 기술을 습득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적응하지 않는다. 아마도 여전히 나의 육체는 한 꼭지의 글을 쓰는 것마저 버거워하며 투덜댈지도 모른다. 이제 갓 글쓰기를 시작한 마당에 주제넘은 소리겠지만 글쓰기는 곧 삶인 것 같다. 일정한 시각, 일정한 자리에서 글쓰기를 하려는 의지적 습관만이 나의 육체를 글쓰기에 적합하게 적응하게 할 것이다.
별다른 방도는 없다. 그저 성실하고 꾸준히 까마득한 먼 길을 묵묵히 가는 수밖에….
그런데 나의 게으름 탓에 이 습관을 길들이는 것조차 버거우니 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