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깍이 엄마의 스토리-2화
“엄마 그 친구는 부처님을 믿어서 안좋아”
얼마 전 어린 딸 아이가 차를 타고 가면서 맥락없이 불현듯 한 말이다.
“부처님을 믿어서 왜 안좋은데”
평소 정도 많고 따뜻하다고 느꼈던 딸아이 입에서 친구에 대한 생소한 생각에 다소 놀란 마음으로 되물었다.
“부처님을 믿으면 안 좋은 거니까 부처님을 믿는 그 친구도 안좋다고 생각한 건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부처님을 좋아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구나”
“응... 엄마는 부처님 좋아?”
“근데 그건 예수님이 원하는 방식은 아닌 것 같은데...다만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지 부처님을 믿는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라고 하시지는 않았는데...종교는 인간을 선하게 한다는 점에서 엄마는 좋다고 생각해.. 다만 부처님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절대자인 신이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다른 의미가 있겠지.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그를 믿기만 하면 그의 힘을 대신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가 갖고 있는 죄와 허물도 용서해 주셔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살 수 있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까...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지...근데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은 친구를 정죄하는 것은 죄라고 하셨어.. 사실 그래서 늘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우리 인간은 죄에서 자유롭지 않겠지”
순간 일장 연설이 되었다.
어린 딸 아이가 이런 나의 장황한 말들을 이해했을 리는 만무하나 엄마로써 알고 있는 선에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얘기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일단 앞섰 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단 아이의 질문을 떠나서 소위 “부처님이 좋아, 예수님이 좋아”는 우리 삶에서 늘 계속된 질문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물론 나도 어릴 때 이런 질문과 물음을 끊임없이 했던 것이 사실이다.
불교를 믿는 친구들에 대해서도 딸아이의 경우처럼 고민해 본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것은 소위 기독교라는 종교가 “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아라” “우상 숭배를 하지 말아라“라는 구절을 강조하는 종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구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경우 이런 오해 소지는 분명히 있을 수 밖에 없으리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같은 사실도 인간의 발달적 수준대로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 들이 듯 종교라는 것 자체가 갖는 다소 높은 수준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은 이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이전에 고차원적인 사고능력을 전제로 할 수 있다는 거다.
20세기 사회과학에서 혁신적인 발견이라고 불리는 피아젯의 인지발달 모형에서 볼 때 사물과 현상에 대해 눈에 보이는 구체적 측면에서 사고할 수 있다는 구체적 조작기인 아이들의 인지 발달 수준에서는 상징이나 추론 등 보다 사실 이면에 있는 고차원적인 추상적 능력을 필요로 하는 해석에 있어서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인지발달 수준에 견주어 볼 경우 같은 현상도 해석의 차이는 필연적인 결과일 수 있다. 따라서 상징적 의미를 많이 갖고 있는 성경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으며 그렇다 보니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는 경우도 당연히 있을 수 있겠다 싶다.
나 또한 내 나이 중년이 되면서 이 구절들이 새롭게 경험되고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같은 구절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의 견해차는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안타까운 건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이런 고차원적인 상징적 의미들을 이해하고 더 깊은 의미를 통찰할 수 있는 인지능력을 갖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란 것을 감안 한다면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된 종교문제가 발생했던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도 수긍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도 종교적 이해의 발달 수준을 경험한 바 있다. 곧이곧대로 구절을 이해했던 어린시절을 지나 추상적인 능력이 가능해지는 사춘기를 넘어서면부터는 기독교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에 대해서 과학적이지 않은 허무 맹락한 픽션이란 생각을 했으며 인간과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도 아담과 이브에게 세상을 관리할 수 있는 주권을 주면서도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다는 말씀도 모두 허구란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 중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기 것을 버리고 오라“는 마태복음 말씀을 보면서 자기 것이란 것을 곧이곧대로 자신의 물질과 돈이라고만 해석하고 이런 모든 걸 다 교회에 바치라는 의미인가 싶어 반감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나이를 먹고 보니 그런 의미로 국한 시켜 해석하기엔 너무 축소된 측면이 있음이 깨달아졌다.
즉 우리 인간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처음 우리를 창조하신 절대자인 그분이 우리 각자가 꽃피우길 바라는 자기 본연의 창조적 의미와 의도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완전하고 완벽한 것이나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많은 죄를 지으면서 이 완전한 창조자의 계획된 우리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면서 물질과 허세를 갖고 살아가게 되는 측면이 있게 된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우리의 내면에는 늘 공허함으로 가득채워져 살게 된다. 이때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에 빠질 수 있다. 그 우상은 돈 일수도 있고 담배나 술 일수도 있으며 게임이나 핸드폰 일수도 있으며 음란한 생각일 수도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는 자신이 창조된 본연의 의미를 모른 채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운 자기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잃어버리고 죄의 노예로 살게 된다. 그리고 세상을 자기맘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죄를 계속 지으면서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는 우를 범하고 그 내면은 행복을 잃게 된다. 그러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이것을 예수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하게 되면 이 죄가 용서받음으로 인해 씻겨질 수 있으며 우리는 처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던 그 본래의 뜻을 갖는 새 사람으로 부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버려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즉 죄에 쌓인 자기가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자기란 심리학적인 의미릐 self의 의미라기보다는 죄로 쌓여있는 ego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선상에서 볼 때 우리의 영을 새롭게 살려내는 것은 사실 인간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1차원적인 본능과 자신의 욕구에만 치우쳐서 판단하고 살아가는 경우와 자신의 영을 거룩하게 가꾸어 나가는 개념은 보다 나 자신을 고차원적이게 하며 우리의 삶이 물질이나 남과 견주어진 삶이 아닌 자신의 본래의 것, 본질에 집중하게 하며 이런 것으로 내 정신이 가득채워질 때 공허감을 떨쳐버리고 충만함의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현실에서도 천국을 경험하며 살게 된다.
그래서 난 예수님이 좋다.
모든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불교도 인간을 바르게 수양하게 한다는 점에서 배척할 종교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불교는 계속적으로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자기의 모든 욕구와 생각이 정답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반은 옳고 반은 그릇될 여지 또한 있을 수 있다. 내가 부처이고 내 모든 선택이 정답일 수 있다는 개념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우려스러운 것은 내 선택과 기준이 기독교의 측면에서 보는 좌에 가려져 있다면 그 선택과 기준은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자인 신을 믿기 때문에 죄에 가려진 자신을 발견하고 창조자가 창조한 본연의 자신을 찾아나가면서도 신이 부여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의미 또한 깨닫게 되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를 수양하고 바르게 하는 삶에 그치지 않고 세상 것에 욕심을 쫒기보다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한 사명과 소명의식으로 세상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고차원적인 생각과 행동의 결실을 맺게 된다. 즉 이 새로워진 내면은 좀더 의미 있는 일과 가치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갖도록 한다. 이런 점에서 좀 더 파워플한 측면이 있으며 실제로도 파워플하다.
그러나 기독교 또한 전제하는 단서가 필요하다. 교회의 영적 리더자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평신도는 영적 리더자의 영성을 뛰어넘기에 제한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따라서 영적 리더자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아직 구체적 조작기 수준에서 말씀을 해석하고 전하고 있는지 진짜 하나님 말씀의 고차원적인 의미를 알고 전달하는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