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도대체 뭔대”

: 늦깍이 엄마의 스토리-3화

by 영주




결혼하고 7년 만에 첫 애를 낳았다.


결혼만 하면 아이가 생기는 줄 알았던 나로써는 7년간 아이가 없는 것을 견디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실 나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 꿈, 내 성취가 중요하기도 했고 남자에 쉽게 빠지는 ‘급빠사’의 유형도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어린 시절부터 또래보다 발달적으로 키도 컸을 뿐만 아니라 정신연령도 높았던 나는 또래 남자 아이들에 대해서 이성적 호감을 별로 느끼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결국 나는 5살 연상의 지금 남편을 만났다.

물론 결론적으로 말해 5살이란 물리적 나이가 많다고 정신연령이 높은 것은 아니란 것을 미처 감안하지 못했다는 것을 난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고 바로 알았다.


집에서 언니들이 하나둘 일찍 결혼을 하기도 했고 강한 독재적인 성향의 엄마를 맞설 사람이 없다보니 타겟이 오롯이 내가 되면서 엄마는 계속적으로 나의 결혼 여부에 스트레스 압력을 주었다. 아마도 엄마로써의 책임과 과업이 강했던 엄마는 여자가 결혼 적령기를 넘기면 결혼하기 힘들어진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나를 빨리 결혼시켜야 한다는 엄마로써의 숙명을 안고 그 불안을 나에게 쏟아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때는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하는 간섭이라고 여기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의 엄마로써의 책임감 덕에 나는 그나마 지금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낳고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싶다.


어쨌든 남들처럼 보통의 평범한 삶에 대해서 정답을 두지 않고 살았던 나는 어찌어찌해서 타의반 자의반으로 이렇게 결혼을 했다. 그리고 엄마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만으로 180도 다른 성향의 남편과 조율하는 과정도 우리집과 다른 문화의 시댁을 조율하는 과정도 미리 예견된 과정이기 때문에 견딜만 했고 나름 한동안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이란 과제를 끝내고 나니 또 다른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사실 남편이 외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이를 갖는 것에 굳이 연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것은 내 성향이 뭔가에 너무 연연하거나 인생의 정답을 갖고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은 그냥 단순히 소풍 나온 것이며 언제든 죽을 수 있으며 내 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나는 사과 나무를 심을 것이다라는 것이 그 당시 나의 삶의 태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이유와 의미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해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사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였다.


여기서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고 어떤 성과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난 늘 내 삶에 책임을 갖고 열심히 살 수 있었고 자유로움과 소소한 행복함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내 직업에서도 나는 최선을 다해 소명의식을 갖고 열심히 임했지만 거기서 내가 명성을 얻거나 유명해지는 것에 큰 뜻을 두지 않았다. 나는 겉에 보여지는 명성보다 내 실력이란 본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가 소명을 다해 최선을 다했으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서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집안에 대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이 주어지면서 아이가 있고 없고 여부는 어느새 내 인생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닌 반드시 가져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되어 있었다.


결혼하고 3년간은 언젠가 생기겠지 하면서 태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면서는 다소 위기감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 때 “의술의 힘을 빌려보는게 어때”라는 주위의 권유가 슬슬 시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인공수정 3번을 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늘 숨죽여 지켜본 임신 테스트기에는 버젓이 한 줄만 그어져 있었다.

허무했다. 그렇게 계속되는 야속함 속에서 생각보다 아이를 갖는 것이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영원히 내 인생에서 아이는 없는 것 아닐까’

불현 듯 두려워졌다. 점차 무서움과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불임 5년째가 되면서 다소 강박적일 만큼 나의 사고가 불임으로 꽉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슬슬 나의 시야까지도 지배하면서 횡단 보도에서 마주치는 임산부을 마주하는 것에도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죽어도 나를 위해 슬퍼해 줄 단 한 명의 살붙이조차 없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 순간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인공수정에서 시험관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두 번 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실패였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한테 시험관 실패의 이유를 물으면 돌아오는 답변은 항상 똑같았다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남편도 나도 특별한 불임의 사유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더 답답함을 주었다. 분명한 이유가 있으면 그 이유를 찾아 제거하면 되지만 이유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큰 바위에 바위 치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이 무책임한 의술에 내 인생을 맡기고 이처럼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쓸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건 내 성격이기도 했다. 난 뒤에서 불평하고 이간질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고 불평만 하면서 시간과 에너지를 쓸 시간에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내 삶의 방식은 이 불임 앞에서도 발동하기 시작했다. 다시 원인을 찾기 위해 모든 과정을 되짚어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대체의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결혼 전부터 갖고 있던 남편의 지병이 뭔가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결혼하면서도 그 지병으로 양방 약을 10년 넘게 먹고 있었고 증상의 개선이 아닌 억제에 치유친 스테로이드 약으로 인해 면역력이 다 떨어져 늘 피로감을 호소하며 기가 빠져있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더 우려스러운 것은 그 당시 자주 복통을 호소하고 있던 터였다. 그때 그냥 지병이 있구나 정도로 치부하며 숙명처럼 받아들였던 남편의 상태에 대해서 불임을 겪으면서 새롭게 조명되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난 두 번의 시험관 시술에서 착상이 문제가 아니라 늘 세포가 분열하다가 멈추는 양상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포착한 나는 몸을 먼저 정상화시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방에서는 이 지병과 임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였으나 내 생각은 달랐다. 이 지병과는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양방 약에 의존해서 증상 억제에만 치유친 치료가 결국 면역력을 떨어뜨리면서 세포를 약화시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과정을 성공하려면 남편의 설득이 우선이었다. 오랜 시간 양방 약을 먹으면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해준 그 약에 거의 의존하고 있던 터라 당시 그 약을 끊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시도한 전략은 남편과 함께 대체의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 갖기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해 남편은 양방 약을 과감히 끊고 자기 몸을 바꾸기를 스스로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남편은 이제는 거의 의사나 약사에 뒤지지 않는 의학적 지식과 우리 몸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몸이 매우 좋아졌고 점차 혈액 속에서 염증 수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였을까 생각지 않게 어느 날 첫 아이가 찾아왔다.

무사히 열 달을 보내고 튼튼하고 건강한 우량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서 비로서 우리는 피를 나눈 가족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를 낳으면서 아이가 주는 행복의 시간만큼 생각지 못한 희생과 조율도 함께 맞물려 있다는 것이었다. 가족은 또 다른 이름의 책임이며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나와의 싸움에 처절한 과정이 선행되어야 함을 기나긴 과정을 견디면서 알게 되었다. 구성원이 많아질수록 그 역동안에서 예측할 수 없는 고려해야할 변수들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비로서 인간이 인간으로써 진정한 인간이 되는 진통의 과정임을 살아가면서 그 진가를 깨닫고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만든 가족을 지켜나가면서 비로서 나의 엄마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냥 나에게 원래부터 엄마 아빠였던 나의 엄마 아빠는 이 과정 속에서 오늘날의 내가 있기까지 그들의 무수한 노고의 산고의 결과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난 여전히 진통 중에 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참고 견디고 맞추는 과정들, 나의 욕심을 버리고 조율해 가며 희생해야 하는 과정들...미성숙하고 완전하지 않은 나와 다른 대상들을 온전히 다른 객체로써 봐주어야 하는 과정들..


사회적 관계에서 나는 특별히 스트레스를 경험할 이유가 없었다. 잘 맞출 수 있는 성격이기도 했고 집착이 별로 없는 나는 타인과 그렇게 부딪힐 일도 없었다. 그리고 너무 나와 맞지 않음 안보면 그만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족은 달랐다. 상처의 역동이 있음에도 그것을 끌어안고 함께 진통의 과정을 헤쳐나가는 과정들이 필요했다. 나와 안 맞다고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망망대해를 헤쳐가면서 한 배를 타고 함께 목적지를 향해 나가는 과정들..그렇기 때문에 함께 슬픔도 기쁨도 한 배에서 나누며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야 거친 파도를 헤치며 안정적인 목적지까지 잘 도달할 수 있는 과정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나의 구성원들과 뜻을 같이하고 조율해 가면서 힘을 모으는 과정은 그야말로 대단한 과정이며 또한 쉽지 않은 과정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가족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가족 안에서 진짜 보석을 만드는 과정은 이처럼 녹녹치 않은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들 때 서로의 상처를 건들지 않는 마지 노선에 대한 규칙과 각자의 역할에 대한 이해,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마음가짐과 건강한 의사소통의 소통의 과정들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서로가 자기가 선장이라고 진두지휘하려고 한다면 또 각자의 주어진 역할을 하지 않거나 규칙을 어기는 행위가 계속적으로 일어난다면 그 배는 망망 대해 안에서 좌초될 위기에 있게 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를 낳기 전에 먼저 부부가 잘 조율된 관계여야 함이 중요할 것 같다. 서로의 선을 넘지 않으면서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어려울 때 역할 분담을 잘 할 수 있는 자아의 분화가 잘 이루어진 성숙한 인격, 그리고 경계가 건강하게 형성된 관계 말이다.


큰 애를 낳고 몇 년이 지나고는 뜻밖의 선물로 둘째를 낳고 이제 우리는 네 가족이 되었다.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지만 특히 늦은 나이에 아이 하나도 아니고 둘을 그것도 각자가 자기 일을 왕성히 하는 시기에 양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과정이 쉽지 않음을, 가족이란 숭고한 이름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이 녹녹치 않은 경험 속에서 알았다는 점에서 이제서야 나도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어른”이란 이름이 걷어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족을 이루며 깨달아가고 있다.

아직 우리의 갈 길은 멀다. 이제 우리는 바다 한 가운데를 지날 준비가 필요한 때다.

이 숙명의 과제를 잘 해쳐 나가기 위해 우리의 배를 다시 정비해야겠다.


배를 어떻게 운전해야 하는지 방법과 바다의 위험을 대처하는 법을 아직 다 배우지도 않은 채 자기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혼자 나가고 싶어 하는 사춘기가 도래하고 있고 이제 조금씩 운전이 신물이 나고 있는 갱년기라는 질적으로 다른 발달이 맞물리는 일생일대의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태풍을 맞이할 수 있는 좌초의 위험을 민감하게 잘 감지하면서 예전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 만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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