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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이 Sep 22. 2024

#엄마3-하얀 경차

같은 엄마, 다른 엄마 (짧은 에세이적소설 모음집)

내가 아는 엄마는 승용차로 나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다시 데리러 오는 기사였다.


내가 집에서 먼 중학교에 배치됐을 때 엄마는 생애 첫 자동차를 구매했다. 하얀색 경차가 처음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날, 엄마의 표정을 기억한다.


얼굴뿐만 아니라 목소리에서도 행복함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미간 사이의 주름은 펴져있었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하던 그날의 엄마 뒷모습은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엄마는 아빠 몰래 운전학원에 등록했다. 구시대적이었던 아빠는 엄마가 운전을 할 수 있게 되면 어디 도망이라도 갈 줄 알았나 보다. 들킬까 조마조마해하며 자동차 운전면허 책을 장롱에 꽁꽁 숨겨놓고 틈틈이 이론 공부를 하던 엄마는 어느 날 내 손에 막대사탕을 쥐어주고는 "여기 가만히 앉아서 엄마 하는 걸 지켜봐"라고 말했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파란색 큰 트럭에 탔다.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에 탄 엄마는 땀을 뻘뻘 흘리며 우왕좌왕했지만 어느덧 운전대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S자, U자로 차를 몰더니 나중엔 앞에서 뒤로, 뒤에서 옆으로 주차를 했다.



그 모습이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다. 운전하는 엄마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구나. 엄마가 운전을 연습하는 건 마치 내가 학교 숙제를 해야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숙제를 비밀로 해줬다. 동생이 숙제를 안 하고 논다고 아빠한테 이른 적은 있지만 엄마가 아빠 모르게 운전 학원에 다닌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그렇게 기를 쓰고 면허를 딴 엄마는 운전할 줄 아는 신여성이 됐다. 물론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아빠는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신여성 앞에 무릎 꿇은 아빠는 지금은 딸이 모는 차를 타고 뒷좌석에 가만히 앉아 있다.



정작 딸이 운전을 배울 땐 화를 내기는커녕 주차가 어려워 식은땀이 흐르는 딸이 안쓰러 몸소 밖에서 진두지휘를 했다. 한아름 반찬 꾸러미를 안고 독립한 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차된 차를 아슬아슬하게 빼서 집으로 가는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본다.


다시 나의 운전기사였던 엄마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엄마는 자식을 위해 운전을 시작했지만 자동차를 타고 어디든 갔다. 아빠랑 싸운 후 뻥 뚫린 도로를 달리기도 했고, 먼 지방에서 온 할머니를 모시러 기차역까지 마중도 나갔다. 그렇지만 엄마가 모는 차를 가장 많이 탄 건 나다. 자식을 위해 운전을 배웠다는 엄마는 나를 어디든 데려다주었다.


편안하게 뒷좌석에 타는 건 언제나 나였다. 두 다리 쭉 뻗으며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독서실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공부를 했고 대학을 간 이후론 서울에서 집까지 오고 가는 버스정류장과 기차역에 엄마가 비상 깜빡이를 킨 채 정차하고 나를 마중 나왔다.  


하지만 언제나 좋았던 건 아니다. 하얀 그 경차는 엄마와 나의 숨겨진 역사를  알고 있다.



뒷좌석에 탔던 학생 때나, 운전보조를 하겠다며 조수석에 탔던 20대에도 나는 운전을 하는 엄마를 쳐다보며 많은 감정을 토해냈다. 울면서 엄마의 잔소리를 반박했고,  어느 땐 큰소리로 엄마가 틀렸다며 화를 냈다. 서로의 감정이 격앙됐던 날, 엄마가 급정차를 하더니 나보고 내리라고도 했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치열한 감정을 그 차 안에서 나눴다.


 엄마랑 지지고 볶고 한 세월이 그렇게 속절없이 그 하얀 경차 안에서 지나갔다. 주행거리 대부분이 나와 함께였을 터.


그러나 이젠 그 경차를 떠나보내야 한다. 아빠는 모르는 엄마와 나의 시간을 간직한 그 차는 이제 많이 낡았고 모났다.



차를 떠나보내기 전 날, 나는 엄마 몰래 그 경차와 사진을 찍었다. 엄마를 기억하고 싶어서. 먼 훗날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어서. 그리고 내가 엄마한테 말한 모진 말들을 꿀꺽 삼키고 떠나 달라고 부탁하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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