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것 같지 않던 뜨거운 햇살도 따갑게 달아오른 아스파트의 열기도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입버릇처럼 달고 있던 "덥다, 더워"라는 말은 어느새 "오늘 아침은 춥지 않아?"라는 말로 바뀌었다.
성급한 이들은 얇은 경량 패딩을 꺼내어 입기도 하는 그런 계절이다.
그때 잃어버린 청자켓, 이 계절에 입기에 딱일 듯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고 만다.
딱 하루 입었던 그 재킷은 결국 내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날이 선선해지고 아침저녁으로 겹쳐 입을 옷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면 왜 하필 그 옷이 생각나는 건지.
청자켓을 떠올린 그날 이후, 우연처럼 대학 동문 모임의 연락을 받았다.
졸업한진 25년 만이다.
그전에도 모임이 있었겠지만, 나에게 연락이 닿은 건 아마도 최근에 연락이 닿기 시작한 동문 녀석 중 한 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딱히 참석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청 재킷과 함께 잊고 있었던 그 선배의 유리알 같은 눈이 떠오르자 나는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참석을 결정했다.
그날 벤치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던 그의 투명한 눈은 나를 통과해 이곳이 아닌 저곳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고 껍데기만 남은 그가 가려고 하는 곳이 그가 바라보는 그곳일까 짐작했었다.
텅 비어 버린 그를 벤치에 홀로 두고 갈 수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차마 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올 수 없었던 나의 무기력함이 그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게 했다.
"B야 그 선배 있잖아?"
"누구?"
"그 마르고 창백한 얼굴에 맨날 데모한다고 수업도 잘 안 들어오던 2학년 선배 있잖아?"
"야, 그때는 다들 수업보다 데모하러 가던 게 일상인데 그렇게 말하면 알 수 있나, 구체적으로 말해 봐?
"아, 그때 한 밤중에 학교에 사복형사들이 쳐들어와서 싹 다 잡혀갔었는데...."
"아, A선배 말하는 거구나. 한 달 정도 구치소에 있다가 학교로 돌아왔다가 휴학했잖아"
"그래 A선배, 그 선배도 이번 동문 모임에 오는가?"
"글쎄, 아마 올 걸"
"S전자 다닌다고 그러던데 잘 나가나 봐. 지난번 모임 때도 나왔었고 별일 없음 나올걸, 왜? 그 선배가 궁금한 거야? 학교 다닐 때는 휴학도 하고 복학 후에는 우리 학과랑 자매 결연 되어있던 태국으로 유학도 가고 해서 동기들이나 밑에 후배들이랑은 그다지 친분이 없었는데, 너는 어떻게 그 선배를 기억하네.?
B에게는 청자켓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 나와 A 선배와의 이야기는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길게 설명하기에 지나온 시간이 멀어 "그냥"이라고 설명하고 말았다.
모임은 학교 앞 주점을 빌려 마련되었다.
10명 정도의 조촐한 모임이다.
내가 다닌 학과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학과였기에 내가 졸업하던 그 쯤에 사람들이 주축이 되는 동문 모임이라 사람이 많이 모이지는 않은 듯했다.
아는 얼굴도 있었고 기억에 흐릿한 얼굴들도 있다.
얼굴을 맞대고 술 한잔이 들어가고 인사를 하다 보니 긴가민가 했던 얼굴들도 그래 맞아 맞장구를 치게 되었다.
시간이 얼굴과 머리숱과 구부정한 어깨 위에 정통으로 지나갔지만.
술이 들어갈수록 예전의 그 얼굴들이 시간을 비껴간 듯 어제 같은 모습들로 변해가고 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술도 무르익어 간다.
그때까지 A선배를 찾지 못 한 나는 그가 어디쯤 앉아 있는 걸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B야 A선배는 안 보이는 데"
"아 조금 늦는다고 했어, 아마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런 대화를 나눈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A선배가 들어왔다.
앙상한 어깨 위로 셔츠가 헐렁했었던, 그리고 언제나 사색하듯 조용한 말투의 그는 어디로 사라지고
"좀 늦었다, 여기 1차는 내가 계산한다." 호기롭게 말을 던지는 A는 더 이상 셔츠가 헐렁하지도 않고 조용히 말하던 수줍음이 느껴지는 말투도 아니다.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50대 후반, 세상살이에 익숙한 평범한 이곳의 사람일 뿐이었다.
그때의 그는 투명한 눈으로 나를 통과해 저 먼 곳까지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를 붙잡고 이곳으로 데리고 왔었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그는 그날의 그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성급히 술잔을 들어마시면서 늦은 사과를 대신하고 있었다.
1차 자리를 끝내고 일어서다 그 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잠시 "너...." 누구지 알듯 말 듯 하다는 듯 갸웃한다.
내 소개를 하자 그는 "아~ 맞다"라고 반갑다 인사를 건넨다.
흔한 인사말,
"잘 지내지? 하는 일은 잘 되고?"
그는 자신이 청자켓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야, 어쨌든 반갑다 자주자주 나오고 해라 하도 안 보니 얼굴도 가물하잖냐"
2차로 옮겨간 자리에서는 몇 명이서 따로 자리를 앉아 소그룹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흔한 이야기들.
직장이야기.
주식이야기.
경제이야기.
그리고 정치이야기.
자신의 자랑을 덧 붙이며 이야기는 끝이 없다.
작은 소그룹들은 서로서로 멤버가 바뀌면서 계속 이어졌다.
잠시후 내가 앉아있던 테이블로 그 선배가 왔다.
멤버들과 조금전 나누던 그런 흔한 이야기가 이어지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을 때.
그는 술 한잔을 따르고 나에게도 권했다.
"청자켓"
"네?"
"그 청자켓, 내가 돌려줬었던가?"
그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내려놓고 그를 보았다.
더 이상 그의 눈은 그날처럼 맑게 빛나지는 않았지만, 잠깐 어릿하게 흐려지는 그의 눈빛 그 어딘가에서 그날의 그의 흔적이 느껴지는 듯했다.
"처음에 널 알아보지 못해 미안했어. 네 이름을 듣고 그 청자켓이 너보다 먼저 생각이 나더라. 그런데 그 재킷을 어떻게 했는지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네 하하"
그는 웃었지만 그의 웃음에는 무언가 결핍된 듯한 미진한 무언가가 느껴졌지만 나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웃음을 따라 나도 웃으며, 사실은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청자켓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술잔을 기울이고
직장이야기
주식이야기
경제이야기
그리고 정치이야기에 자신의 자랑을 덧 붙이며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뿐이다.
아마도 그날 그는 그가 바라보던 그곳 어딘가에 자신의 본질을 묻어두고 빈껍데기로 이곳에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과 지금의 그와는 그 처럼 먼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다른 그룹의 자리로 이동했다.
그의 투명한 눈과 먼 곳 어딘가에서 한 참을 서성였을 그의 본질을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그처럼 흐릿한 그림자로 이곳에 살아가는 나도 본질이 없는 껍데기로서 여기 이곳에 남은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현상을 보지 말고 본질을 보라고 말하던 그는,
현상 속에서 본질을 잃고 그림자로, 껍데기로도 충분한 것일까
그림자로 살아가다 보니 그것이 진정한 나라고 믿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저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던 그를 통해 나도 그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동경심이 그날의 나는 아니었을까?
벤치에 홀로 두고 떠나온 것은 결국 나라는 본질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