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을 잤다.
지난밤 휴대폰의 배터리가 간당간당했지만 무선충전 패드 위에 올려놓기에는 늦지 않았다.
여느 날처럼 몹시 피곤했기에 충전 패드 위에 올려놓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났을 때, 창을 통해 흐릿하게 밝아오는 빛의 양으로 보아 일어나야 할 시간에서 멀지 않았음을 짐작해 본다.
하지만 시간은 확인하지 않는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보게 되면 어설픈 잠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다시 잠자리에 누워 한두 시간은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까무룩 잠이 든다.
그렇게 잠이 들었는데, 이상하다.
기상 시간에서 겨우 한두 시간 정도 남았을 텐데 그 시간을 훌쩍 넘긴 것 같은데 왜 알람이 없지?
살며시 눈을 뜨고 등지고 있던 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이런, 생각보다 날이 밝다.
얼른 휴대폰을 집는다. 앗, 충전패드에서 충전되고 있을 휴대폰이 꺼져 있다.
급하게 전원 키를 눌러보지만 완전 방전된 폰은 바로 켜지지 않는다. 얼른 일어나 안경을 쓰고 멀리 책상 위의 시계를 본다.
9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 사무실에 출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에 나는 침대에 있다.
에라 모르겠다~ 허탈 해져 다시 누워 버린다.
직장을 그만두고 자영업을 시작한 지 4년이 지났다. 조금 늦는다고 누가 탓할 사람도 없고 9시면 아직 이른 시간이라 업체에서 전화가 오거나 찾아 올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이없지만 마음은 느슨해졌다.
이왕 늦은 거 천천히 하루를 시작하자.
그런 하루의 시작이었다.
평소보다 늦었지만 하루의 시간은 변함없는 일상으로 차근차근 흐른다.
계획에 없던 늦잠 덕분에 몸이 가볍다.
점심 식사 후 2시가 넘어가면 나른한 졸음이 왔었는데 그날은 그런 것도 없이 가볍기만 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시간에 일과는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헬스장으로 향하는 발검음이 오랜만에 경쾌하다. 왠지 오늘은 더 무거운 무게를 들 수 있을 것 같고 마무리로 러닝머신 위에서도 폭발적으로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와 '실상'은 다른 것인지, 평상시 들던 무게는 여전히 무겁고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는 나의 다리는 여전히 힘들다. 왜 그럴까? 몸은 확실히 가벼운데, 갸웃했지만 그런 가 보다며 평소처럼 마무리를 하고 샤워를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은 여전히 가볍다.
가벼운 흥얼거림은 오늘의 몸 상태가 오랜만이라 기분이 좋은 탓이었다.
기분 좋은 허기짐도 좋다.
얼마 전에 산 계란을 아직 하나도 먹지 못했는데 4개 정도를 부쳐 먹어야지. 아니 5개 정도도 괜찮지 않을까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공복감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팬을 꺼내고 기름을 쏴~악 한 바퀴 아니 두 바퀴 두르고 가스불도 켜고 냉장고를 열어 계란을 꺼내서 그동안 가열된 팬 위에 탁탁탁탁 보기 좋게 깨서 넣는다. 파르르 기름 튀는 소리가 좋다. 잠시 냄새를 맡으며 지켜본다.
어랏, 비틀.
어지럼증이 살짝 느껴진 건 착각일까? 팬을 찬찬히 다시 바라보는데 빙글빙글 어지럼증이 착각이 아닌 실체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왜지? 나는 싱크대를 두 손으로 잡았다. 어지럼증은 점점 심해지는 듯 서 있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 한번 팬 위에 익어가는 계란을 보고 그 밑에 파랗게 타오르는 가스불을 본다. 그래, 가스.
가스가 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얼른 불을 끄고. 가스불도 잠그고, 이미 비틀거리다 못해 바닥에 쓰러질 것 같은 위태함을 겨우 버티며 베란다를 비롯해 모든 문들을 열었다. 간신히 문을 열어두고 침대에 쓰러진다.
침대에 누워 무엇 때문 일까를 생각했다.
정말 가스일까? 그렇다면 문을 열어둔 것 만으로 괜찮을까?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 걸까?
아님 운동 전에 먹었던 음식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걸까? 온갖 생각이 어지러운 중에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깊은숨을 통해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노력한다.
그러자 조금씩 안정이 되는 듯했다.
그래 가스구나. 그런 거구나 확신이 가까워지자. 이제 방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벽에 의지해 간신히 1층으로 내려와 차로 이동했다.
여전히 추운 날이고 밤이다.
급박하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탓에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 하고 1층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로 이동했다. 추웠지만 문을 열어두고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젖히고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안정이 찾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가스였어. 확신에 가까운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어떡해야 되지..
간신히 안정되어 의자를 바로 세우고 신고를 해야 되나 핸드폰을 켜서 보는데 괜찮아진 게 아니었다.
극심한 어지럼증과 구토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다시 의자를 뒤로 하고 누웠고, 이제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낀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진다
아 이러다 정신줄을 놓을지도 모른다.
혹시 심혈관 질환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그때서야 들었다. 최근 주위에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었다.
나도 이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의식을 놓을지 모른다. 시간이 없다. 아직 정신이 있을 때 뭐라도 해야 된다. 그래 119. 급하게 긴급 전화를 누른다.
상황을 설명하고 나의 위치를 말하려는 데 생각이 한참 뒤로 물러나 모든 게 하얗게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위치추적을 부탁한다, 는 말을 간신히 남기며 빨리 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10분 뒤에 도착합니다"
그 말이 구원처럼 느껴졌지만, 까마득히 먼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제로 기다리는 10분은 엄청나게 오랜 뒤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 먹었던 걸 다 토해내고 있을 때 응급차가 왔고,
나의 상태를 확인하던 응급대원은 심혈관 특히 뇌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소견으로 응급실에 연락을 취하고 있다.
응급대원은 자꾸만 정신이 하얗게 멀어지려는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나이 이름 그리고 가족관계 기존에 먹는 약, 무얼 하던 중이었냐는 등등 귀찮을 정도로 많은 것과 세세한 것들을 물었지만 나는 간신히 답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덜커덕 거리는 응급차 안은 춥다.
옷이 얇았다.
춥다고 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급하게 신고 나왔던 운동화 한 짝이 간신히 발끝에 걸려 있다.
제발 신발 좀 제대로 신겨 줄 수 없을까요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소소하고 세세한 질문만이 끝이 없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을 했고,
MRI, CT, 엑스레이, 피검사 등등 여러 가지 긴급 검사들이 이루어졌다.
가누기조차 힘든 몸은 이리저리 떠밀리며 여러 군데 검사실로 옮겨졌다.
여전히 추웠고 여전히 한쪽 신발은 위태롭게 발끝에 걸려 있다.
누구도 신발 따위는 신경 써 주지 않는다.
수액을 맞고, 어지럼증에 대한 주사를 맞고,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을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잠이 들었다 깨어났지만 꿈은 아니었다.
여전히 응급실 침상에 누워있고, 어지러웠지만 이제는 정신을 잃을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새벽에 나온 결과 들은 심혈관이나 뇌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는 결과였다.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정신이 들고 알게 된 건 "전정신경염"이 나의 어지럼증의 원이이었다.
검사에서 심각한 질병이 아님을 확인한 후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움직임이 다소 느긋해진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확인차 돌아온 당직 의사는 아침에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눈을 뜰 수도 없고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데 퇴원해도 된다니 의심스러웠지만 알겠다고 그렇게 하겠다고 답을 한다.
밝아올 것 같지 않던 다음 날의 아침은 밝아왔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전정신경염은 귀에 걸리는 감기라고 불릴 정도로 흔한 질병 중 하나라고 했다.
나처럼 이렇게 급성으로 찾아오는 경우도 있는데 대개는 하루 이틀 정도 힘들다가 괜찮아진다고 했었다.
그러나 내 경우는 정도가 심했고, 거의 5일을 침대에 누워 있었야 만 했다. 3일째 되던 날인가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 자리에 일어나 가벼운 운동 겸 산책을 했고, 내일이면 업무에 복귀도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꼬박 이틀 더 침대에 누워 있었야만 했다.
지금은 한 달이 조금 지나 완치된 듯 하지만 여전히 운동 수행능력에는 문제가 있다.
조금 과한 운동을 하면 어지럽고, 숨이 찬다.
귀에 걸리는 감기. 그 말처럼 심각한 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날 나는 아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인 걸까 라는 어렴풋한 느낌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치워두지 않은 집,
누군가 대신 정리해야 할 흔적들.
끝내지 못한 관계, 미안함과 고마움을 말로 남기지 못한 채 흘려보낸 시간.
정리되지 못한 상태로 떠나게 된 다는 두려움이 죽음 보다 더 두려웠던 기억이 남았다.
죽음이 두려웠던 게 아니라 스스로 정리하지 못 한 채 떠나는 두려움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커다란 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