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국가에 대한 강한 소속감과 애국심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고자 한다.
보수주의는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국가의 안보와 주권, 독립을 보호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보수주의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애국과 충성의 대상이 "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주의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과도한 민족주의와 자국 중심적 자긍심에 빠질 수 있으며, 자국의 역사나 문화, 성취를 과장하거나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치우침을 우리는 극우나 극좌로 부른다.
극우는 배타적 민족주의, 강한 권위주의, 외부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특징으로 한다.
'국뽕'이라 불리는 현상도 보수적인 성향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지나친 자국의 민족이나 문화가 우월하다고 믿고,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사회적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은 극우적 경향의 일환이다.
결국 보수주의는 민족적 자긍심에서 발현된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 역시 보수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강하진 않지만, 국가를 위해 희생한 애국자들의 숭고한 희생을 접할 때마다 깊은 공감과 존경을 느낀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위대한 보수주의자들은 독립투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가망 없는 의병 활동을 거쳐, 결국 조선을 떠나 망명지에서 오롯이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들의 최후는 비참했고, 많은 경우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광복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제대로 된 평가도 보상받지 못했다.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그들은 일제에 부역했던 이들에 의해 고통받았고,
진정한 보수주의자 였던 많은 애국자들은 정치적 탄압 속에 이제는 불령선인, 혹은 테러리스트에서 빨갱이로 내몰려 정치적 탄압에 의한 정신적 사망과 물리적 죽음까지 선고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돈은 결국 힘이며 권력이다.
일제에 부역했던 이들은 축적된 재력으로 권력을 쥐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힘은 더 강해져 견고한 성을 쌓아 올렸다.
반면,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고, 그들의 후손들 또한 가난을 대물림 받았다.
가난은 그들을 분열시키고 고립시켰으며, 연대보다는 생존을 위한 경쟁을 강요했다.
돈으로 권력을 강화했던 이들은 권력을 통해 다시 돈을 얻는 순환 구조를 만들었고,
이제 그들의 성(城)은 누구도 허물 수 없을 만큼 견고해졌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점차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가는 것도, 그들이 만든 보이지 않는 견고한 계급 구조 안에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사이의 간격은 더욱 벌어졌고,
그만큼 서로에 대한 공감은 벽이 되었다.
권력을 쥔 자들은 이제 그들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들보다 못한 이들을 짓밟고 이용하는 데 조금의 부끄러움이나 망설임조차 없다.
권력을 쥔 그들은 이제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 말하며, 북한이라는 적을 내세워 불안정한 안보 위협 속에서 애국을 무기 삼아 이념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그들의 애국에는 "국가"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의 이익에는 “국민”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대상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과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의 애국에는 "국가"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의 이익에는 “국민”이 없다.그들이 말하는 대상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과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한 욕심과 야욕을 비판하는 자는 진보주의 혹은 좌파로 몰리고 위협받는다.
언론은 공정한 재판관처럼 그 둘의 대립을 비난한다.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비난을 함으로서 그들의 대립에 사람들이 실망하여 관심 밖으로 끌고 간다.
이는 기득권을 영구히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여러 이름으로 존재 했다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남은 '보수주의자'라는 이들은 겉만 남은 껍데기일 뿐이다.
심지어 보수주의 단체라고 하는 이들이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업적을 깎아내리려 하고, 노벨 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을 모욕하며, 스위스까지 가서 시위를 벌이기까지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애국의 대상이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진정한 보수주의의 부활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설령 보수주의가 다시 부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제발 보수주의라는 말을 더 이상 오염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최근 이러한 오염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엄마부대'라는 단어가 어떻게 '엄마'라는 단어를 오염시키고 있는지, 우리는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독일에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시위를 하기 위해 우리나라 “엄마부대”가 간다.
현지인들 조차 그들의 행동에 깜짝 놀랬다는 반응을 뉴스로 접한다.
"엄마"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에게 깊고 벅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감정은 보통 무한한 사랑, 따뜻함, 그리고 보호받는 느낌과 관련있다.
엄마라는 존재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우리를 돌보고, 지켜주고, 인생의 여러 순간에서 가장 가까이서 함께 해주는 인물로 기억된다.
이런 이유로 "엄마"라는 단어는 단순한 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해주고, 이해해주며, 언제나 곁에 있어주는 존재를 상징하는 고귀한 단어였는데 “엄마부대”는 그 단어를 이렇게 훼손했다. '태극기부대' 또한 마찬가지다.
태극기 하면 떠오르는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과 애국심에 가슴 뜨거워지는 감정을 느끼곤 하는데 “태극기 부대”는 태극기의 이미지를 어떻게 훼손 하고 있는 가는 많은 기사들에서 확인하고 있다.
이처럼 단어의 오염은 가치를 오염시키고, 그 의미를 훼손한다.
나는 보수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의 보수를 보수라고 부르는 것이 부끄럽다.
이들은 때로는 반지성주의, 때로는 정치 업자, 혹은 이익집단이라 불려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부활하길 바라면서, 정리되지 않은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