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날의 북극 Dec 25. 2024

기억에 대한 오해/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삭막한 이 공간 안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 책 한 권이 있었다.

얇고 세로로 긴 책은 그 크기와 얇기로 봐서는 시집일 거라고 짐작되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놓여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표지는 제법 깨끗하고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구김 없이 깨끗했다.

별 할 일이 없었던 나는 그 책을 집어 들어 책 표지를 살폈다.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오규원!


오.규.원. 이라는 시인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내 속에서 무언가 심하게 요동치는 전율이 느껴졌다. 텅 빈 우물 속으로 투척된 두레박의 비명 같은 메마른 마른 소리가 내 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곳으로 감금되기 전 그의 시를 읽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님 그를 개인적으로 알기나 한 것인가? 알 수 없는 전율과 떨림에 다소 당황한 나는 그가 쓴 시를 읽어 나갔다.


하지만 책 표지에서 느꼈던 울림은 책을 읽는 동안은 느낄 수 없었다.

모호하고 난해한 그의 언어들과 암호와도 같은 점 들,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넓은 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이었다. 처음 그 책을 발견했을 때의 떨림은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그 책을 집어 든 건 당신이 처음입니다."


한쪽 벽에서 페트병에 물을 가득 담아 아령 삼아 운동을 하던 남자가 불쑥 말을 건넸다. 그의 시선은 페트병과 꿈틀 대는 자신의 이두근을 관찰하고 있었다.

제법 근사하게 발달된 이두근에 그는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곳에 그런 책이 있다니, 이상하죠? 제가 이곳에 올 때부터 그 책은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은 당신도 잘 알고 있듯이 책이 있을 만한 곳 도 아니고 책이라고 해도 성경책 정도면 모를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연하게도 아무도 시집 따위에겐 관심이 없었어요. 시집이라서가 아니라 여기에 온 사람들은 책꽂이에 어떤 책이 있는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이 좁은 방안에 어째서 책처럼 쓸모없는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의아해하는 정도가 아니었을 까 싶어요. "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책장과 책, 그래서였는지 언제부턴가 그 책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실체로서는 책꽂이에 분명 존재하고 있었겠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책장에 그 책이 사라져 버렸다고 해도 누구도 신경 쓰질 않았기 때문에 궁금해하거나 그 책의 행방에 대해 알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그 책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 방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완벽하게 감금된 3평 남짓한 이 방 안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건 대단한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라졌다는 것조차 아무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금된 이곳에서 그러니까 모든 것이 제한된 이 장소에서 어딘가로 사라진다는 사실 만으로도 큰 사건인데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그는 이제 페트병을 내려놓고 팔 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우리들 보다 먼저 이곳에 있던 전임자에게 들은 말로는 누군가 출소를 하면서 자신의 소지품이었던 책을 빠트리고 간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간수들이 수거해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것이 안전상으로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기껏해야  얇은 시집 한 권이고 시집이라는 것이 오히려 정신을 정화시켜 주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는지 그 책은 수거되지 않았습니다. "


"시집이라는 것이 정신 교화에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긴 읽지 않는 책이 사람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만 말입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곳에서는 누구도 책은 읽지 않아요. 그것이 시집이든 소설책이든, 어쩌면 맥심 정도라면 모를까?"

자신의 농담이 마음에 들었던지 팔 굽혀 펴기를 잠시 멈추고는  나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그는 적당히 땀이밴 얼굴로 일어나 이번엔 윗몸일으키기를 하기 위해  바닥에 수건을 깔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시 따위를 읽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거나 정신이 정화되고 마음이 순화되는 뭐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할까요? 아님 그 책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졌던 것처럼 사라지는 능력을 갖게 되는 건 아닐까요?"

라며 그는 낄낄 거렸다.

이번에도 자신의 농담에 아주 만족한 듯 보였다.


사라지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 어떤 점에서 웃긴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는 몹시 흡족해 보였다.

3평 남짓한 방에서 모습을 완전히 감출 수 있다는 건 과연 대단한 능력일 거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은 벽이고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은 밤낮없이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아니 보이는 이곳은 모든 것이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사라지는 능력이 있다면 이곳에서 빠져나가서, 아니 실체적으로는 이곳을 벗어나지는 못 하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3평의 작은 이 공간에서는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나 자신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는 제한된 공간이었다.

숨을 쉬면 숨소리가 내 귀의 오른쪽을 통해 왼쪽으로 빠져나가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닿는 정도의 좁은 방이었다. 타인의 체온이 나의 체온인지 그들 중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정도의 거리. 

내 마음에 작은 파장이 일어난다면 3평의 작은 방은 온 통 그 파장으로 흔들릴 것 같은 규모의 방이다.

어쩌면 오규원의 시를 발견하고 전율했던 나의 떨림도 이 방에 있는 다른 이들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떨림을 알고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얇은 오규원의 시집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가 농담처럼 말한 사라지는  능력이 숨겨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것은 평범한 작은 시집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한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작은 그 책은 마법서 같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의심으로 굳어지자 그 책은 비밀의 무게만큼 실체적 질량을 더해가면서 무거워져 손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책 표지에 쓰인 글 귀를 다시 유심히 살펴보았다.

시인의 말처럼 토마토는 붉다 그렇다고 달콤할까?

라는 의문으로 나는 그 문장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달콤한 것은 토마토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난해한 그의 문장들이 난해한 지금의 현실과 뒤엉켜서 글의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사라지는 능력.

나는 그 말을 마법의 주문처럼 작게 입안에서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작은 소리는 멀리 번져 나가지 못하고 목구멍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내 귀의 오른쪽을 지나 왼쪽에 닿기도 전에 말이다.


윗몸일으키기가 끝이 났는지 그는 힘겹게 바닥에 등을 누이고 천장을 바라본다.


나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의심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작고 거친 그의 숨결이 방안 벽 여기저기 울려서 메아리처럼 가득하다.

그가 등을 누이고 있는 마룻바닥에 작은 이 보였다.

오래된 마룻바닥이라 조금씩 이가 맞지 않는 부분들이 여기저기 보였지만

그렇게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틈은 처음이었다.

작은 틈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작고 메마른 소리가 그의 거친 숨소리에 슬며시 스며들어 울렸다.

작은 틈에서 들리는 소리치고는 제법 거칠고 요란한 소리였다. 

텅 빈 우물에 던져진 두레박의 메마른 비명처럼 존재감이 확실한 그런 소리였다. 


그 순간 '마룻바닥의 틈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라고 했던 누군가의 음성이 오랜 기억 속 메이리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분명 그렇게 나에게 경고했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만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 마룻바닥은 어디 할 것 없이 조금씩 틀어져 작은 틈들이 여기저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틈들 속에 내가 사라졌던 혹은 내가 길을 잃어버렸던 틈도 존재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운동을 끝낸 남자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지금 3평의 이 좁은 방안에 나를 제외한 네 명의 사람 중 한 명인데 그의 시선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거친 숨결이 벽의 이곳저곳에 부딪혀 울리던 메아리도 어느새  점점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의 존재감 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가 자랑스럽게 바라보던 우람한 이두근도 느껴지지 않는다.


'사라지는 능력을 갖게 되는 건 아닐까요' 라며 웃던 그가 3평의 좁은 감옥에서 완벽히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마룻바닥의 틈들 중 어느 곳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그 틈들 중 하나에 깃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토마토는 붉다. 그렇지만 달콤한 것은 토마토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소리 없는 목소리로 말해 보았다.

소리 없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던 모든 것들은 마룻바닥의 틈으로 흘러들어 가 어딘가에서 조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만 이곳 3평의 공간에 내가 알지 못하는 네 명 아니 그가 사라지고 난 후 남은 세명과 함께 누군가의 망각 그 속에서  점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나의 존재라는 것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다면 혹은 나의 기억 속에서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실체로서의 존재가 있는 것인지 묻고 싶어졌다.

당신 중 누군가는 나를 기억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예정된 순서대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오규원 시인은 토마토가 붉다고 말했고 나는 그의 문장과 문장사이의 틈에서 결국 길을 잃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이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그가 말한 붉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사라질 능력.

그렇게 사라질 능력을 갖게 된 것은 나였을까

아님 당신이었을까


나는 이 기억이 소멸하기 전 당신과 다시 한번 조우하고 싶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