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었었던 걸까. 잊고 있던 한기가 소름처럼 밀려왔다. 오래된 담요를 이마까지 덮고 있었지만, 어느새 어깨쯤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다.
난로는 꺼진 지 오래인 듯, 타다 남은 석유 찌꺼기의 그을음 냄새가 공기 속에 떠다닌다. 시간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어느 시(時)에서 얼마만큼 흘렀는지 알 수 없다.
이제 어둠은 모호한 경계에서 점점 짙어져 사물의 형태를 흐릿하게 삼켰다. 모든 것은 경계 없이 한 몸인 것처럼 완벽한 어둠이다. 손으로 더듬어야만 겨우 원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듯 했다.
담요도 마찬가지다. 어깨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지만 눈으로 살펴보기에는 형태가 불분명하다. 손을 뻗어 끌어당기자 담요 다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이 잠들기 전 덮고 있던 그 담요인지 확신할 수 없다. 기억 속 담요는 빛바랜 색감이었고, 매끈하면서도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한때 햇볕을 머금었던 바삭한 햇빛 냄새가 어렴풋이 배어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하지만 지금은 색도, 냄새도 희미하다. 아니 그 냄새에는 햇빛 냄새 대신 축축한 습기가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절망의 냄새다. 시간이 끝나가는 절망감이 담요에 배어든 듯하다.
시간이 끝나 간 다는 것은 문장으로서가 아니라 실체로서도 그러한 듯했다. 방안 어딘가에 시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이곳 어딘가에 시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계의 시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시계가 보이지 않으니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아무도 모르게 시간이 멈춰져 버려 시간이라는 개념이 완성된 문장처럼 끝나버린 듯 한 착각이 들었다. 물론 초침 소리가 사라졌다고 시간이 멈출 리 없다는 것을 안다. 시간이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 버린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도 시간이 흐른다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창밖은 온통 어둠뿐이고, 창문이라는 틀만 없다면 그저 또 하나의 벽일 뿐이었다. 그렇게 사방은 분간할 수 없는 어둠과 벽으로 둘러싸여 이곳의 시간은 실종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아무도 모르게 유배되어 버린 이곳은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지워진 고대의 유물이라고 해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진 이곳에는 시간도 지워지고 멈춰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을까?
하물며 내 기억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이 실재한다고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
"이제 너에게 남은 조력자는 쓸모없는 너 자신 뿐이겠지."
창밖 어딘가에서 누군가 비웃듯 속삭였다. 완전한 어둠이 내리기 전, 마지막 동전을 털어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았었다. 6.5oz 작은 컵 안의 커피는 손안에 미약한 온기를 남겼고, 따뜻함이 입안을 지나 목을 타고 흘러 몸속 깊이 스며었다. 그것이 허락된 마지막 온기였을까. 그것이 나라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을까?
이제 내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동전 하나와, 조력자를 잃은 나 자신만이 남아 있다.
커피 한 잔이 만들어준 작은 온기도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걸까. 이곳에 오기 전,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도착했을 때는 아직 햇살이 남아 있었을 텐데, 기억나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낯설지 않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의 일부였던 것처럼.
어둠이 깊어질수록 아침은 다가올 것이다. 결국 아침은 순서에 따라 밝아 올 것이다. 시계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곳이라도 자연의 순리는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짙어진 어둠은 결국 사라지고, 먼 곳에서부터 소문처럼 햇살이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시계가 없는 이곳과는 달리 어느 시(時), 어느 지점(地點)에서는 착실하게 시간을 밀어내고 있을 것이다. 세계는 보이지 않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그곳에서 떠밀려 간 시간은 마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차례로 밀려 이곳의 시간도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비록 시간의 속도가 제각각일지라도.
그로 인한 시간의 속도 문제 때문에, 설령 먼 과거 속에 갇힐지도 모른다 해도 그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지금도 착실히 이곳의 시간도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분명 이곳은 존재했고, 존재의 순간들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증명할 수 없는 나 자신과 절망감이 배어든 담요, 그리고 역할을 끝낸 난로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이곳에 시계 없는 시간이 있었다.
비록 고대의 잊혀진 유물로서 남게 될지라도, 존재 했음이 증명 되지 않더라도.
완결된 종식이 아니었음을 누군가는 기억해 주길 바란다.
주머니 속 쓸모없는 동전 하나가 묵직하게 느껴졌을 때, 나의 조력자가 사라지고 쓸모없는 나만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가 나는, 거기서 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기억은 그렇게 언제나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