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지우고, 줄이고, 바꿔라를 읽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노는 토요일이 있던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학교를 가는 토요일엔 수업이 끝나면, 필기도구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던 난, 문구점에 들러 필기구 코너를 구경하곤 했다.
그 시절엔 뭐라도 하나 유행하면 학교 전체가 그 흐름을 따라갔고, 그중 하나가 샤프였다. 특히 일본제 샤프가 꽤나 유행해서 반 친구들 대부분이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그 샤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샤프를 생각하면 난 지우개가 함께 떠오른다.
지우개는 반도 못 쓰고 잃어버리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리고 널찍한 몸통에는 샤프로 새겨 넣은 구멍과 자국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남아있었고, 그런 지우개는 청소시간에 바닥을 쓸다 보면 교실 바닥 어딘가에 뒹굴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지우개를 쓰다 보면 힘 조절이 안 되어 종이를 찢어 먹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샤프 끝에 달려있는 불량한 지우개는 오히려 번지게 만들어 곤란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지우기보다 지워지지 않도록 글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썼던 기억이 있다.
평소 전시를 보는 걸 좋아하는데, 전시 장소는 한적한 곳에 있기보단 보통 번화가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면, 골목마다 빽빽하게 들어선 가게들과 눈에 거슬리는 입간판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건물 이마에 붙은 간판들이 앞, 옆, 심지어 뒤까지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괜히 심술이 나서 눈을 피하게 된다.
글도 마찬가지다.
했던 말을 또 하고, 굳이 필요 없는 말을 더하고, 살을 붙이면 글은 금세 읽기 어려워지고, 딴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런 나라가 있다면 난 아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을 것이다.
평소 내가 입버릇처럼 쓰는 대표적인 의존명사라서다. '의존명사에 의존'하는 참된 명예시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존명사 중 특히 많이 쓰는 ‘것’, ‘수’, ‘적’만 줄여도 글은 훨씬 간결해진다.
된장찌개에 이것저것 넣다 보면 더 이상 된장찌개가 아닌 것처럼, 잡탕이 되기 전에 재료를 덜어내야 한다. 글도 이것저것 재료를 넣다 보면 어느새 지저분해지고 처음 썼던 내용이 더 나을 때가 많다.
일상에서 대화하다 보면 상대방의 말이 장황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요약해서 말해줘!'
말이나 글이나 늘어지고 복잡해지는 이유는 학생 때부터 교육으로 길들여진, 말이나 글이나 질보다는 양을 추구하는 습관 때문이지 않을까? 같은 내용도 길게 써야 분량도 맞고, 얼핏 보면 있어 보이니까.
그리고 평가받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늘여 쓰는 게 일종의 보험이고, 읽는 입장에서는 '뭐라도 했네' 싶은 착각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예전엔 돈까스를 주문하면 동그랗고 널찍하게 덩어리째로 나왔다. 보기엔 푸짐하고 맛도 좋아 보였다.
근데, 그 보기 좋은 돈까스를 실컷 감상하고 난 뒤, 오는 생각은 '이걸 언제 자르고 있지?'였다. 나이프로 반듯하게 자르는 게 먹기 전 준비운동처럼 여겨져 빨리 달라는 입과 느릿한 칼질이 피곤했다.
요즘은 돈까스를 주문하면 한 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라져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먹기 전 노동도 없고, 바삭한 식감과 온기를 바로 느끼고 먹을 수 있어 참 좋다.
글도 쉼표와 접속사로 길게 이어지는 문장은 읽기 전부터 숨이 막힌다. 이 문장의 끝은 어딘가 하고 내용을 읽기 전에 마침표부터 찾는다.
특히 '-고', '-며' 같은 어미만 잘라줘도 훨씬 읽기 편해진다.
나는 의무병으로 군 생활을 했는데, 가장 먼저 한 일은 약 이름 외우기였다.
왜냐하면 하루 일과가 군의관님이 처방한 약을 진열대에서 바로 찾아 약 봉투에 담는 일이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가장 많이 처방된 건 감기약이었고, 그 감기약이란 이름 아래 종류도 참 다양했다. 그래서인지 재고는 항상 여유 있게 둬도 자주 쓰이는 약은 모자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군의관님께 이 약은 없고 다른 약이 있다는 걸 말씀드려야 했다.
또 내가 근무하던 곳은 여덟 분의 군의관님이 돌아가며 당직을 서던 곳이라, 각기 선호하는 약이 달랐는데 특히 타이레놀이 기억에 유독 남는다.
타이레놀은 한 통에 천 개씩 들어있었고 정말 자주 썼다. 이 타이레놀을 부르는 이름은 군의관님 마다 다양했는데, 에이에이피(AAP), 아세트아미노펜, 타이펜 등. 부르는 이름이 달랐지만, 환자에게 설명할 땐 다들 약속이나 한 듯 ‘타이레놀’이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게 환자가 알아듣기 가장 쉬운 말이었다. 어려운 용어를 풀어 말하는 건 배려다. 전문 용어도, 문장도, 결국엔 상대가 이해하기 쉽게 바꾸는 게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을 때 괜히 긴장하게 되는 버릇이 있다. 마치 달리기 출발선 앞에 선 것처럼.
글에 쉴 틈이 없으면 숨이 차고, 한 가닥으로 길게 뽑은 된 국수를 한 번에 먹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첫 문장만 읽고 마라톤을 달릴 것 같으면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누른다.
독후감을 쓸 때마다 첫 문장을 생각하고 쓰는 시간이 가장 길다. 오늘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는 그렇게 쉽게 써지면서, 주제가 책으로 바뀌었다고 그렇게 쓰기 어렵다.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있어 독후감은 마치 공문서처럼 격식 있는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일까?
변명이라면, 오늘 하루는 오감으로 느낀 모든 걸 재료로 쓸 수 있다. 노래만 들어도 몇 년 전, 몇십 년 전 추억이 떠오르고, 냄새만 맡아도 어떤 순간이 떠오른다. 하지만 독후감은 여백과 글, 재료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또, 책을 하루 만에 다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개 며칠에 걸쳐 읽다 보니 앞 내용은 희미해지고 뒷 내용만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독후감을 쓰려고 하면, 책 내용을 한 번 훑어보고 흐름이 이어질 수 있게 쓰려고 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달까?
글쓰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이 책 덕분에 오늘은 이전보다 덜 복잡하게, 조금은 덜 욕심내며 쓰게 되었다. 글을 잘 쓴다는 건, 어쩌면 ‘잘 쓰는 법’을 아는 게 아니라, ‘덜어내는 연습’을 계속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우고, 줄이고, 바꾸다 보면 언젠가는 내 문장이, 정말 내가 쓰고 싶은 문장이 남을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