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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권 Sep 06. 2023

다들 이러면서 사는 걸까?

고래가 사는 세상

언제부터인가 마누라가 고양이처럼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이젠 아예 대놓고 하이에나 같이 이빨을 드러내며 나를 겁주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 일들을 끄집어내면서 시비를 걸어오고 있는 거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얼마 전의 일도 잘 기억 못 하면서 수십 년 전의 일, 그것도 안 좋았던 일들만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했다. 냉면 가개 앞에서 성질부린 일은 단골 메뉴이고 일본 갔을 때 미국 갔을 때 어쨌다는 등 옛날일을 끄집어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럴 때면  늙은 염소 같은 모습으로 나는 바삐 그 자리를 피해 버리는 게 최선 인듯했고 또 같이 술이라도 한잔 할 때면 언제 또 지난 일로 시비를 걸어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한 탓인지 술도 밖에서 마실 때보다 빨리 취해버렸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객지벗 10년이면 친구 라며 말을 놓고 지낸 지도 이미 오래되었고  호탕한 웃음과 하품은 물론 방귀까지 아무 때고 스스럼없이 갈겨 대는 걸 보면 방송에서 본 남성 호르몬의 과다분비로 인한 현상 바로 그거  같았다. 시골 장터에서 뒷짐 진 영감이 이빨 쑤시게 입에 물고 거들먹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마누라에게서 비춰지지만 비아냥 거릴 수도 없는 게  지금 나의 현실이니 마른 양말이나 뒤집고 청소등 자질구래한 일들과 식사준비등을 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야말로 이 집안의 노비 같은 처지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생각 속에 살고 있다. 모처럼 여행 이 라도 떠날라치면 힘든 일은 모두 내 차지라 여행의 참맛을 느껴본지도 오래됐기에  나는 늘 혼자만의 여행을 꿈꾸고 있다. 그래도 여행 중 같이 한잔 할 때만큼은 젊은 시절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주종  같은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곧 현실로 돌아갈 것을 알기에 마냥 분위기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 아 옛날이여를 소리치면 뭐 하겠나 봄날은 바람 따라가고 없으니 말이다. 이순 (耳順) 고희(古稀) 어디다 다 팔아먹고이제 희수(喜壽)를 앞두고 있는 나, 이제는 누가 먼저 갈지도 모르는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젠 마누라의 폭정도 참고 견딜만하다는 생각을 하는 나는 그야말로 가스라이팅 당한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많아지는 이른 새벽  음악을 들으며 모아놓은 글들을 정리하는 이 시간이야말로 나로서는 그나마 자유롭고 행복한 시간이 아닌가 싶다. 요즈음 부쩍 늘어난 친구들이나 그 부인의 부고소식을 듣고 나면 나도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그동안 쌓인 미운 정, 고은정 때문이라도 남은 인생 불평 없이 지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마누라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그래도 지지고 볶던 47년의 세월이었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내리는 겨울밤 완행열차 차창가에 기대어 술 한잔 기울이며 늘 꿈꾸던 고향을 찾아 떠날 때가 되면 마누라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속에 이번생은 이렇게  막을 내리려 한다. 며칠 후 내 생일이라고 전야제까지 생각하는 마누라를 보면 미운 우리 새끼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음생에도 다시 부부로 살고 싶냐고 누가 묻는다면 다음 생에는 스쳐 지나가지도 말자는 말을 늘 주고받은 터라 그건 오랜 시간 고민 해봐야 할 것 같다는 답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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