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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떠난 여행

고래가 사는 세상

by 구일권

집사람은 일 년에 두세 번 만나는 손주들이 눈에 밟히는지 아침마다 손주들 사진과 인사를 나눴다. 그러더니 어느 날 아들집에 가서 손주들과 지내고 싶다며 두 달 여정으로 홍콩에 갔는데 간지 벌써 보름은 넘은 거 같다. 덕분에 모처럼 잔소리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지내고 있는데 며느리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버님 뭐 하고 지내세요? 라며 이것저것 물어보기에 어 운동도 하고 사람들 만나 한잔하고 그러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했더니 아버님 혹시 지루 하시면 일본 여행이나 다녀오실래요? 그러길래 나야 바깥바람 쐬고 친구도 만나고 그러면 좋지라고 그랬더니 평소엔 동작이 느리다 생각한 아이였는데 그런 얘기 꺼내기 무섭게 바로 여행비용을 보내왔다. 어젯밤 좋은 꿈을 꾼 것도 없었는데 예정에도 없던 여행을 떠나게 되니 갑자기 흥분되며 바빠졌다. 동경이나 오사카 가서 친구 만나 한잔 하고 올까 하는 생각을 하다 이번에는 혼자 호젓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주 오래전에 한번 간 적이 있던 가고시마 아래 이브스키( 指宿)라는 동네가 생각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복잡한 곳을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술이나 한잔 하며 온천이나 즐기다 와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내 생각으로는 초봄이라 그곳도 썰렁할 것 같은데 4일 동안을 뭘 하며 지내다 올지 선뜻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곳은 이모 소주라고 불리는 고구마소주가 유명하고 흑돼지 그리고 뜨거운 모래찜질, 온천 뭐 대충 그런 거밖에 없었다. 그러나 며느리가 큰맘 먹고 보내주는 여행이니 일정은 현지에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비행기와 숙소 예약을 끝낸 며칠 후 나는 가고시마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쪽으로 와본지는 꽤 오랜 전 일인데 골프 때문에 미야자키(宮崎)와 가고시마를 들린 적이 있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려 도착한 가고시마 공항,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인 거 같았다. 약간은 허접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입국수속을 하는데 규모가 작아선지 수속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살짝 짜증이 났다. 아날로그 방식을 선호하는 일본이기에 더욱 그런 거 같았다. 한참만에 공항을 나와 버스를 타고 이브스키 가는 열차를 타러 역으로 향했다. 역 근처 식당에서 흑돼지 돈카츠에 소바로 배를 채우고 나서 역 개찰구로 나가는데 역무원이 기차표를 직접 펀칭해 주는 모습은 그옛날의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이브스키를 향해 달리는 열차 창밖으로 보이는 사꾸라지마 화산은 평온해 보이지만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용처럼 느껴졌다. 수시로 분화를 일으키고 있는 사꾸라지마는 잠시 잠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를 가다 보니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가 열차에 부딪칠 것 같기에 밖을 보니 철로옆 방파제 아래가 바로 바다였다. 모처럼 만나는 바다 그리고 혼자만의 여행을 즐기게 된 나는 저절로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가고시마에서 이브스키가 가까운 줄 알았는데 그래도 꽤나 먼 거리였다. 역에 내려 예약한 여관에 연락하니 차를 보내왔고 그 차를 타고 20분가량 가니 바닷가 근처에 있는 Shusui- en(秀水園)이라는 여관에 도착했다. 1963년에 문을 열었다는 이 여관 입구에 들어서니 일본만의 옛날 전통인형들이 나를 반기듯 쪼르르 앉아 있었다. 직원 안내로 내가 선택한 다다미방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나는 바로 온천탕으로 달려가 긴 하루동안 쌓인 기분 좋은 피로를 씻어 버렸다. 잠시 조그마한 정원을 거 닐다 보니 어느새 저녁시간, 식당으로 가니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와있는데 다들 가족 단위로 온 듯했다. 그런데 나만 달랑 혼자 앉아 극진한 써빙을 받으려 하니 뭔가 스미마셍 한 게 비행기 퍼스트클래스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제공되는 가이세키 요리는 이미 알려진 대로 아름답고 맛있는 요리였다. 여관 내부 시설이 조금 낡기는 했지만 복도벽면에는 그림과 글씨, 도자기등이 진열돼 있어 가고시마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문득 학교 다닐 때 사귀던 여자친구를 만나러 방학때 처음 가봤던 전라도 광주 어느 다방의 미술 전시관 같은 그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런 느낌이었다. 다음날 아침 어제저녁 맛있는 음식 때문에 좀 과음을 했는지 늦잠을 자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여종업원의 아침식사 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학교 가라고 깨우는 어머니의 정겨운 목소리와 같았다. 이날도 훌륭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역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여관에 비치된 여행 안내서 이런 걸 떠나서 그냥 혼자만인 것을 즐기려 무작정 어디론가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생각끝에 역에서 남쪽 방향으로 가는 낡은 통근 열차 같은 걸 탔다. 가다 보니 주위가 온통 유채꽃밭이었다. 한참을 더 가다 어느 무인역에서 정차를 했는데 그곳에 내린 몇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 대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내려 보니 이곳이 일본 최남단역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어쩌다 내가 일본 땅끝 마을까지 왔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미 여행을 하면서도 파타고니아에 가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가슴에 담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이 나에게 작은 위로를 준 것 같아 좋았다. 그러지 않아도 어제저녁 술 마시다 동경 사는 친구에게 전화로 내가 이브스키에 왔다고 했더니 일본 관광객들이나 가는 그런 시골엔 왜 갔냐고 그랬다. 그러더니 오늘 아침 자기도 일이 있어 아오모리에 가는 중이라며 열차 운전석 옆에서 찍은 눈 내리는 풍경을 동영상으로 보내왔다. 아직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아무도 없는 역에 내려 걷다 보니 유채밭 앞으로 어디서 본듯한 커다란 산이 나타나 나를 가로막았다. 핸드폰으로 뒤져보니 가이몬다케라는 활화 산이라 했다. 이나라는 온통 용암을 뿜어대는 활화산뿐이니 언젠가 다가올지도 모르는 재난이 잠시 걱정되기도 했다. 거기다 여름에 태풍이 오면 비껴갈 적이 없는 이곳에서 나는 세상에 혼자 남은 사람처럼 한참을 서성 거렸다. 올레길 초입이라는 이 동네는 커피 한잔 마실 데도 없는 데다 갑자기 날도 흐려지고 추워진 탓인지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질 않아 너무 멀리 온것은 아닌가 하는 긴장된 기분마져들었다. 동경 갈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잠시,그만 숙소로 돌아가려고 역으로 돌아오니 지붕 하나만 덮고 있는 무인역이라 찬바람도 막을 수 없는 데다 열차가 오려면 한 시간반 이상은 기다려야겠기에 역 근처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허름한 가개를 찾아 들어갔다. 어둠 침침한 내부에서 눈에 딱 띄는 건 이곳 특산품인 무로 만든 꼬들꼬들한 단무지였다. 나는 얼른 단무지 두 개와 마른오징어를 집어 들고 계산하면서 주인아주머니에게 부탁해 택시를 불러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몸도 녹일 겸 해변에 있는 사라쿠라고 흑모래 찜질 하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삽으로 몸 위에 모래를 덮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의외로 너무 뜨거워 참을 만큼 겨우 버티다 튀어나왔지만 나오고 나니 좀 아쉽다는 생각에 본전 생각이 났다. 아주 푹 쪘어야 직성이 풀리는 건데 하고 말이다. 여관에 돌아오니 할 일도 갈 곳도 없으니 또다시 한가한 온천탕 속에서 없는 때를 밀어가며 전세 낸 듯 홀로 목욕을 즐겼다. 저녁은 어제와 또 다른 진수성찬이었다. 내가 매일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건지 황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이런 호사를 누리게 해 준 며느리에 감사 문자와 사진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을 먹은 후 간단히 짐을 챙겨 아쉬운 마음을 남겨둔 채 직원들의 송영 인사를 받으며 여관을 나섰다. 오늘은 가고시마 시내에서 숙박을 하며 그 동네 이자카야에서 한잔할 생각이었다. 가고시마 중심가인 덴몬칸 근처에 예약한 호텔에 짐을 풀고 근처식당에서 덴동으로 점심을 먹으며 맥주 한잔을 했다. 그리고는 이 동네를 탐색할 겸 거리를 싸돌아다니다 호텔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인 후 후 낮에 봐두었던 이자카야 골목으로 향했다. 오밀조밀한 골목 안으로 몰려 있는 가개들은 일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ㅇㅇ 요코 쵸라 불리는 그런 골목 풍경이었다. 간판이 그럴듯한 가개를 찾아 들어갔다. 좀 이른 시간인지 그렇게 붐비지는 않아 쉽게 자리 잡고 앉아 안주를 이것저것 시킨 후 마시기 시작하다 보니 어느새 내 주위로 손님들이 가득 찼다. 그러더니 옆자리에서 혼자 마시는 내게 관심을 가지며 말을 걸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혼자 왔다는것과 내나이를 알더니 에~~ 그러더니 스고이를 연발 했다.파파고의 힘을 조금 빌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건배를 하다 보니 맥주부터 소주. 사케까지 술에 게걸이 들린 듯 신나게 마셔댔다. 그건 물론 그곳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즐거웠고 또한 술만 마시면 잊어져 가는 일본말이 살아나 신이 났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헤어질땐 말짱한 정신으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호텔로 돌아와 기절하듯 침대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사실 이번 여행은 며느리와 나만 알고 있는 여행이었다. 마누라가 알게 되면 며느리에게 부담주며 혼자 호강하며 지냈다고 이런저런 시비를 걸어올 것이 뻔하기에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당장은 얘기하지 말라고 며느리에게 신신 당부 하고 떠났었다. 하여간 올 때는 최소한의 짐만을 챙긴 작은 기내용 가방이었는데 이제는 그 안에 덴몬칸 돈키호테에서 산 약 몇 개와 내가 좋아하는 단무지 그리고 명란 한 꾸러미에 맛 있다고 추천받은 고구마 소주 한 병까지 더해졌다. 꿀같은 3박 4일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인데 뭔가 허전한 것은 잔소리꾼인 마누라가 아직도 집에 없어서일까! 그러나 옆구리가 시리더라도 혼자여서 좋았다. *고마웠다 JS(며느리)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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